생명의 힘이었다.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생명의 힘이었다.

몇 개의 구릉을 넘어서자 바람의 기세가 꺾였다. 바람이 저지하는 힘이 약화되자 몸이 먼저 바람의 위력을 실감했다.

역설이었다. 바람에게 저지를 당할 때보다 바람의 힘이 약화 되었을 때 그 위력을 실감하다니.

발걸음을 옮기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바람의 위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느끼는 수월함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고유한 기능을 상실해버린 상태에서 옮기는 발걸음은 오로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본능이었다.

제법 굵은 돌이 발부리에 차였다. 주먹보다 크게 느껴지는 돌들이 깔려 있는 지역으로 들어섰다.

더께가 낀 듯한 발바닥의 통증이 다시 살아났다. 발바닥의 통증이 걸음을 빨리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발바닥의 세포들이 어서 빨리 레이스를 끝내고 쉬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내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세포들이 생명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송 관장님, 앞에 여우가 있어요.”

정혜경씨가 오랫동안 이어져오던 침묵을 깼다.

“정말 여우가 나타났어.”

창용찬씨 목소리에 뜻밖의 상황에 대한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이 황막한 사막에 전갈 따위 작은 생명체도 아닌 여우가 살고 있다니. 경이로운 일이었다.

“어, 저놈이 불빛 앞에서도 꼼짝 않고 있네.”

김성관씨도 여우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혜경씨, 여우가 어떻게 생겼어?”

“몸뚱이는 작아요. 한 석 달 정도 된 강아지만 해요. 근데 귀가 몸뚱이에 비해 무척 크네요.”

“저놈이 보기에 우리가 이상한 모양이지. 이 밤중에 인간들이 왜 싸돌아다니고 있나 해서 말이지.”

김성관씨가 모처럼 우스갯말을 했다.

“이놈 누굴 홀리러 왔어. 썩 물러가.”

김성관씨가 사람을 홀리는 여우 전설이 생각났는지 팔을 휘저으며 소리치자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했다.

여우라는 생명체의 출현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캄캄한 밤에 바람과 추위와 허기와 피로에 시달리며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우의 출현은 묘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들 말고도 생명체가 이 밤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몸과 마음을 자극했다.

여우가 남기고 간 자극도 금세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정신과 체력이 인내의 극한점에 다다라서 그런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몽유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저기 앞쪽에 불빛이 보여.”

창용찬씨 말이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붙잡아 주었다.

“체크 포인트가 맞을까요?”

생기 넘치던 정혜경씨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문득 고령인 김성관씨는 오죽하랴 싶은 생각이 들자 반짝하는 불빛 같은 그 무엇이 내 정신을 자극했다.

체크 포인트의 텐트 안에는 틈이 없었다. 닷새 동안 불볕을 내리쬐는 태양을 등에 지고 달려 온 것도 모자라 어둠 속을 헤쳐 온 레이서들이 죽음 같은 휴식을 하고 있었다.<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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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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