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기념할 날들이 참으로 많다.

나라의 경사로운 날이거나 의미가 있는 국경일은 온 국민들이 이를 기리고, 의미를 되새기며 그 날의 참 뜻을 이어간다.

생일도 가족들과 지인들의 축하 속에 기쁨을 더하고,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면 큰 일 나는 아주 의미 깊은 날이다. 기일도 고인의 뜻을 기리며 온 가족이 모여 경건히 지내는 날이다.

연인들은 만난 지 몇 일째라며 다양한 이벤트로 귀한 만남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처럼 세상에는 많은 기념일과 의미 있는 날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장애인이 된 날을 그 의미를 되살리며 지낸다면 어떨까?

필자는 1987년 8월 16일 국경일인 광복절 바로 다음 날, 중량물에 깔리는 사고로 하지마비의 척수장애인이 되었다. 사고로 인한 비탄과 갈등, 가족의 어려움, 삶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의 냉정함,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이기면서 진정한(?) 장애인이 되어 왔다.

그날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매년 돌아오는 생일 같은 이 날은 기념일이 되면 안 될까 하는 의문이 들은 지가 오래전이다. 솔직히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축하를 받아야 하는 그런 날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만 하고 슬픔에 빠져야 하는 그런 날도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 날을 통해서 개인의 삶에 의미가 주어졌다면, 삶의 깊이가 더해졌다면 이 날은 기념일로서 가치가 있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장애를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 참으로 많다.

장애를 통해서 인생의 깊이가 깊어졌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 인내할 줄 아는 참 용기를 알게 되었으며, 다른 장애인을 이해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필 줄 아는 아량을 갖게 되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큰 용기로 이 세상과 맛 짱 뜨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여러 번의 수술을 통해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의연함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유도 장애를 통해 배우게 된 큰 성과이다.

중도장애인과 선천적 장애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장애라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불편하고 억울하기는 해도 절대적으로 불행하지는 않다라는 것에도 확신을 갖는다.

장애가 모든 삶에서 핑계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장애 때문에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겁한 변명이 되는지도 이제는 안다. 조금은 느리지만 조금은 힘이 들지만 가고자 한다면, 이루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은 장애인사회의 선배들이 아스팔트 위와 철길위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하여 사회를 조금 씩 조금 씩 변화시켰고, 필자를 포함한 많은 장애인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처럼 처절하게 몸을 내 던지지는 못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후세의 장애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면에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동분서주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당당해지는 방법도 배우고 도움을 청하고 그 도움에 기꺼운 감사를 전할 줄도 알게 되었다. 삶을 통해서 지혜를 배우고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장애인의 인권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협회 일을 하면서 국내외의 많은 동료 그리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과 교류하는 폭 넓은 네트워크도 가지게 되었다. 비장애인이었다면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었으니 이렇듯 인생을 깊이로 풍요하게 해 준 장애인이 된 날을 굳이 피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겠다.

필자는 2014년 8월 16일, 비장애인으로 산 날과 장애인으로 산 날의 길이가 같은 의미 있는 날을 맞이했다. 이제부터는 장애인으로서의 삶이 길어지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까지처럼 보람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 갈 것이다.

인생은 원래 희로애락이 있고 그 희로애락의 리듬을 잘 타야 인생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장애인이어서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이기에 굴곡과 고저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 주어서 고맙고, 앞으로도 힘을 내어 열심히 살아보자고 필자와 여러분의 장애인이 된 그날을 기념하고 격려해주고 싶다.

하늘아래 의미가 없는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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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정책위원장이며, 35년 전에 회사에서 작업 도중 중량물에 깔려서 하지마비의 척수장애인 됐으나, 산재 등 그 어떤 연금 혜택이 없이 그야말로 맨땅의 헤딩(MH)이지만 당당히 ‘세금내는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대한민국 척수장애인과 주변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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