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의 계절 오월. 적당한 햇볕과 적당한 기온으로 낮에도 밤에도 활동하기 좋다. 그래서인지 빛과 관련된 테마여행이 주목받고 있다. 쪽빛, 물빛, 달빛, 별 빛, 까지. 은은한 빛을 따라 여행하는 코스가 인기 만점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고궁에서도 달빛기행을 비롯해 야간개장까지 고궁만의 빛을 은은히 뿜어내는 기획여행이 늘고 있다.

창덕궁에서는 작년에 이어 달빛기행을 진행하고 있고, 경복궁에서도 야간개장을 시행하고 있다.

달빛기행은 한 달에 두 번, 달이 가장 훤히 뜨는 보름 주기로 시행한다. 덕수궁은 밤 아홉 시까지 매일 야간에 개장하고, 창경궁에서는 이번 주 일요일인 11일 까지 야간 관람할 수 있다.

달빛기행은 기존에 고궁 여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달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 속 창경은 낮에 보는 창경궁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저녁 일곱 시. 궁궐 안은 조명 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고 청사초롱으로 관람 동선이 만들어진다. 일몰 전 푸른빛과 뒤섞인 궁의 풍경은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 건너면 정전인 명정전을 만난다. 옥천교에서 정전 까지 청사초롱이 대신들의 품계처럼 질서있게 기립해 있다. 불빛 때문인지 달빛 때문인지 명정전의 자태가 한결 더 웅장하고 은은하게 다가온다.

명정전 아래에선 은은한 조명 빛이 처마를 밝혀주고, 달빛은 궁궐 안에 멈춰있어 정전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창경궁 명정전은 다른 궁궐의 정전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여행객의 접근이 한결 용이하다. 그래서 인지 명정전의 내부까지 샅샅이 볼 수 있고, 문의 문양 문고리까지 세심하게 볼 수 있다.

창경궁은 성종임금 때 창건됐다.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정전으로 명정전이 세워졌고, 인종임금은 이 곳에서 즉위했다. 또한 다른 궁궐의 정전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창경궁의 정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명정전은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임진왜란 때 불이 나서 소실됐다가 광해군 때 다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궁궐이 창건되게 된 사연과 배경을 알고 여행하니 달빛기행이 더욱 흥미롭다. 전문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왕이 된 느낌도 든다.

정전을 둘러보고 내전인 통명전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사적인 공간이다. 건물에서 뿜어내는 기(氣) 때문인지 연인들이 계단에 앉아있는 모습이 왕과 왕비 같다.

바로 옆엔 환경전도 있다. 중종임금과 효명세자가 환경전에서 운명했고, 그 후론 빈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환경전에서 보는 달빛은 유난히 더 밝게 보인다. 궁궐 안에서 왕으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 갑자기 비운의 왕 광해가 생각났다.

궁궐 곳곳엔 광해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로 가득했고 그들과 맞서 광해의 운명이 춤추는 칼날 같다.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 光海 100卷 8年 2月 28日. 역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사라진 15일간의 역사를 재조명한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는 지금의 정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달빛이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쉬워 환경전에서 늑장을 피운다. 그리곤 단단하게 뭉친 침묵을 깨고 달빛을 따라 나선다.

달빛을 따라 걷다보니 자판기 옆 벤치가 텅 비어 있다. 커피 한 잔의 달달함이 간절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인생도 자판기처럼 동전만 넣으면 자신이 원하는 삶이 툭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커피를 들고 달빛이 흐르는 하늘을 쳐다봤다.

아~!! 이 시간이 얼마나 달달하고 향기로운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 하는 것 같다. 한참 동안 달을 응시하다 다시 길을 나서 춘당지로 갔다.

춘당지는 백 년 전에 조성된 연못이다. 연못 둘레를 따라 청사초롱 등불이 띠를 두르고, 연못에 빠진 달빛이 허우적거린다. 못 한 가운데엔 작은 섬도 있다. 그 섬에서 축 늘어진 버드나무 줄기 끝 잎이 연못에 담겨져 초록물결이 일렁인다.

연못 안엔 달빛도 등불도 빠져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금방이라도 광해가 신하들을 거닐고 연못에 산책하러 나올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만들어 내니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연못 따라 천천히 걷다보니 팔각칠층석탑을 만났다. 석탑은 만주 상인이 가지고 온 것을 매입해서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석탑엔 성종임금 때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글귀가 있어 석탑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연못 위엔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식물원도 있다. 식물원은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당시엔 동양최대의 규모였다고 한다. 지금은 온실이라 고 하기엔 작고 소박하지만 당시만해도 동양최대의 규모라니 관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식물원엔 관상식물과 희귀한 식물이 전시돼 있다.

창경궁은 일제가 우리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1986년까지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불렸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아프다. 세월호 참사로 사월의 상처가 진행 중인 오월. 창경궁 달빛여행으로 잠시만이라도 마음이 치유되는 실록의 계절이길 기도해 본다.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서울대병원 뒤

야간개방은 5월 11일. 일요일 까지

•장애인화장실

궁궐내 장애인 화장실 잘 마련되 있다.

•문의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창경궁의 밤 풍경. ⓒ전윤선

춘당지 풍경. ⓒ전윤선

밤이라서 더 아름다운 창경궁. ⓒ전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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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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