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금살금 다가오는 봄이 경계를 풀었다 쥐었다를 반복한다. 봄은 의심이 많아 막 달려오다가도 멈칫하고, 또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어느 새 앞에 와 있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가는지 모르게 계절의 모퉁이를 획 돌아 가버리니 얄밉기 짝이 없다.

봄은 시시 때때로 달라지는 사람의 감정과도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봄은 하루만큼씩 성큼 다가오고 있다.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 봄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마음이 초초하다.

덕수궁으로 봄 마중에 나섰다. 고궁의 봄 빛깔은 어떤 색인으로 도시민들을 맞이할까. 도심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궁리하는 여행객이 명화와 역사, 문화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미술관에서 지적 사치를 누려보자.

명화와 고궁의 봄을 만나러 덕수궁으로 나선다. 명화를 만날 수 있는 한국 근현대 회화 백선전에서 덕수궁의 매력과 미술관의 매력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국 미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탁월한 장소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덕수궁 미술관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근대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훌륭한 장소다. 일제가 1938년까지 미술관 용도로 건립한 석조전 서관은 1998년부터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됐고, 미술관 외관이나 창문, 그리고 문에 근대의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미술관 정문으로는 휠체어 사용자가 접근할 수 없지만 정문 옆 직원용 문으로 들어가면 리프트를 이용해서 미술관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미술관 전시장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층과 삼층 4개의 전시실에서 시대별 근현대 회화를 만날 수 있다.

1전시실부터 4전시실까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순서대로 볼 수 있다. 1전시실은 근대적 표현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근대미술은 고유한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여러 경로를 통한 외국 문화가 들어오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다. 정리석 화가의 1956년 작 "소환"은 50년대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한여름 저고리 차림의 머리가 하얀 노인과 동네 젊은 청년이 평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 모습은 당시 생활상을 잘 표현했다.

그림 속 중절모자를 쓴 노인은 담뱃대를 입에 대고 훈수 두기에 바쁘고, 엉거주춤 선 자세로 장기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젊은 처자와 부채를 든 채 뒷짐 지고 있는 중년 사내의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햇볕을 가리려 양산 대신 펼쳐놓은 우산으로만은 한여름 더위를 막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림 속 사내들은 흰 고무신과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고 바지는 무릎 아래까지 걷어 올렸다. 평상 밑에는 누렁이가 배를 깔고 혀를 빼놓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어릴 적 흔히 보던 풍경이 화폭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정겹다.

오지호 작가의 “처의 상은” 자신의 아내를 화폭에 담아낸 작품이다. 쪽진 머리에 반달눈썹, 초승달처럼 가는 눈매와 긴 목선은 단아하고 아름답다.

액자 속 여인은 흰 저고리에 빨간 옷고름이 포인트다. 하늘 색 치마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시선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남편을 응시하며 곱게 앉아있다. 여인의 입술은 빨간 앵두처럼 탐스럽고 발간 볼이 수줍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곱기만 하다.

김기환 화가의 “아침의 메아리”도 발길을 붙잡는다. 하늘색과 연한 파란색의 조화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 부드럽고 푹신한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하다. 작품 중간 중간 초록과 빨강, 남색으로 네모 점을 찍어 햇살 좋은 유월의 어느 날을 연상하게 한다.

작품을 조금 떨어져서 보면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눈부셔 꿈 속을 빠져나와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면 시원한 바람과 향기로운 햇살이 마구 내게 달려오는 느낌이 든다.

김기창 화백의 "군락"은 새 떼들의 비상을 표현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참새군락을 화폭에 어찌 담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옆 작품은 변관식의 내금강 보덕굴이다. 금강산을 화폭에 정교하게 옮긴 그림 속 사람은, 티끌처럼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살아 움직인다. 그리운 금강산에 언제쯤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까.

이응노의 1959년 작 "향원정"은 지금과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세월의 무게가 더 얹혔을 뿐이다. 그림 속 향원정의 벚꽃이 팝콘처럼 익어간다. 일제 강점 당시 주인 잃은 향원정은 화려한 봄꽃이 피었지만 왠지 쓸쓸해 보인다. 다른 작가의 수목화 속엔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지만 향원정은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김기창 화가의 "보리타작"은 1956년작품 이다. 한국판 이삭 줍는 여인들이 겨울을 이겨내고 보릿고개를 넘어 잘 익은 보리를 타작하는 날이다. 아낙도 즐겁고 마당에 닭도 배부른 날이다. 절구에서 보리를 빻거나, 새참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여인의 몸짓도 흥겹다. 전쟁이 끝난 오십 년대 그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허기를 보리로 채운다.

허백련 작가의 "산수화"는 1956년대 작품이다. 거대한 산수화에 사람의 흔적 없이 자연만 그려졌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작은 점처럼 찍어 놓은 사람에게서 온기가 느껴진다.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데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문자로 날아왔다. 자연으로 돌아간 그를 생각하니 애처롭고, 그를 보내는 가족들의 슬픔도 전해진다. 그의 소식 때문인지 마음에 구멍이 뚫려 허했다.

삶이 다 그런 것이거늘 왜 이렇게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초조할까. 죽음에 초연하고 싶어서 안그런 척, 씩씩한 척 하는 내가 안쓰럽다. 인생이, 삶이, 그래서……. 미술관에서 허한 마음을 채우고 구멍 난 마음에 지적 사치를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2호선 시청역 하차,

한국 근현대회화 전은 이 번달 말까지 전시한다.

•먹거리

시청 역 근처 50년 전통 유림 면

•장애인화장실

덕수궁 내

•문의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근 현대 회화 100선 전시 알림판. ⓒ전윤선

덕수궁 미술관. ⓒ전윤선

덕수궁 미술관. ⓒ전윤선

미술관 안에서 본 덕수궁 풍경. ⓒ전윤선

덕수궁 풍경. ⓒ전윤선

덕수궁 내 화장실. ⓒ전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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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칼럼니스트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일시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평등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 접근성을 높이고 인식의 장벽을 걷어내며 꼼꼼하고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돈 쓰며 차별받지 않는 여행, 소비자로서 존중받는 여행은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모두를 위한 관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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