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장애인계에서 가장 논쟁이 심한 주제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뭐 장애등급제 폐지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필자는 장애등급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에 관해 고민이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4월에 있을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임원회의를 앞두고 자주 연락을 취하는 사람으로부터 한국에는 요즘 어떤 이슈가 있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나는 장애등급제 폐지에 관한 논의라고 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장애등급제를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장애등급제를 표현하는 것은 쉬운데 그게 뭐냐고 물으면 복잡해지는 것이다. 답장에 “한국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뒤에서 장애등급제를 한참 설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

그래서 외국의 장애등급제에 관해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과연 장애를 등급으로 구분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해서 알게 된 사실들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장애등급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소개된 바도 있어 넘어가고,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의 장애관련 사항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법적으로 장애의 유무를 확인한다. 둘째는 대다수의 국가들이 사회보장급여와 관련해서는 등급제와 유사한 판정기준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사회서비스의 제공에 있어 일선 실무자의 권한을 보장한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중심으로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법적으로 장애유무를 확인한다. 뭐 표현은 다를 수 있지만 “장애 (Disability)”를 법적으로 정의하고 이 정의 속에 속하는 국민을 “장애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규정된 사람들에게는 각종 사회서비스는 물론이고 활동지원급여를 포함한 각종 사회보장급여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한다.

장애를 정의하는 방식도 유사하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 즉, 신체운동능력, 시각, 청각 등 신체적 정서적 능력의 부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보기, 듣기, 말하기, 학습하기, 걷기 등 일상생활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방식인데, 앞에 소개한 방식의 경우 주로 의료 전문인력에 의해 장애유무를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방식은 의료 전문인력 외에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전문인력, 예컨대 특수교사, 사회복지사, 재활상담가 등이 장애유무를 판단하기도 한다. 여하튼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만을 법적으로 내리는 것이다.

일단 장애유무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와 같이 등록제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외에는 거의 없고 국가단위가 아닌 지방정부 차원에서 등록제를 운영하고 있는 경우는 상당수인 것으로 확인되어진다.

특이하게 프랑스에서는 장애인고용제도와 관련하여 장애의 정도가 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여 개별사업장의 의무고용률을 산정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었다. 또 미국의 중증장애인 및 시각장애인 특별고용 프로그램인 에이블온(AbleOn)에서는 시각장애인 및 중증장애인 (People who are blind or significant disabled)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장애의 정도를 구분하여 혜택을 주고 있다.

다음으로 사회보장급여와 관련해서는 장애유무를 넘어서 장애정도를 보다 면밀하게 확인한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미국, 영국,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국가에서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당 급여를 수령하기 위해서는 장애정도를 의료 전문인력에 의해 판정받도록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국가별로 이러한 제도를 기여방식으로 운영하기도 하고 무기여방식으로 운영하기도 한다는 것이며, 기여든 무기여든 의료 전문인력에게 장애정도를 판정하게 하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노동력의 상실정도를 판정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우리나라나 일본과 같이 정형화된 장애판정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사회보장급여의 특성상 장애유무와 정도 외에 자산조사 (Means test)라는 과정을 거쳐 소득이나 재산상황에 따라 급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끝으로 사회서비스에 있어 일선 담당자의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관 서비스와 같이 사회서비스의 제공에 있어 장애유무를 판단한 후에는 사정과 평가과정을 거쳐 필요한 서비스의 내용과 양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좀 다른 측면이 있어 생소한 느낌을 받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약간의 부연을 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장애인복지관과 같은 개별 사회서비스 시설을 통해 서비스를 받고 장애인복지카드를 제시하며 때에 따라 일정한 이용료를 부담하는 것과는 달리 서구나 유럽의 국가에서 운영되는 시설 즉, 장애인의 재활을 포함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선기관은 이용 장애인이 원하는 서비스의 내용을 형편과 사정을 감안해 필요한 서비스로 연계하는 사례관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현실은 후진적이고 서구 및 유럽 국가의 그 것이 선진적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다만, 사회서비스 제공에 차별을 금지하고 서비스 제공의 근거로 복지카드를 확인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등록제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과 다른 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이 장애등급제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에서도 사회보장급여의 제공이나 장애인고용 관련 제도의 운영에서는 장애의 정도를 어느 정도 구분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하여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등급제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기술하는 것으로 오늘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장애의 정도를 등급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하는 비인간적인 제도는 사라지는 것이 옳다. 필자 역시 장애인이고 법적으로 일정한 등급을 판정받았다.

등급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소고기”가 바로 생각나는 것이 나만의 독특한 생각일까? 또 “등급”은 아니지만 사람을 어떤 급수로 구분하는 것은 자격제도에서나 활용하는 체계이다. 개인의 학력이나 경력, 정형화된 시험의 결과에 따라 1급이나 2급 등으로 구분한다. 끝으로 어떤 조직에서 개인의 직위를 급수로 구분한다. 공무원 조직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무관은 5급, 서기관은 4급 부이사관은 3급 하는 방식이다.

우스개 소리지만 “장애등급”이라는 용어 대신 “장애급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같은 방식으로 국가유공자는 상이급수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산재보상제도에서는 “장해급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왜 유독 장애인복지법에서만 장애등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장애’라는 개인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그 정도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제도이므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다음으로 일부에서 제기되는 주장으로 6등급인 장애등급을 중증과 경증으로 간소화하자는 의견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지만 “동문서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장애등급제 논의의 핵심이 바로 “폐지”이기 때문이다. 즉, 장애등급제를 개선하자는 논의에서는 중증과 경증으로 구분하는 의견이 하나의 안이 될 수 있지만 폐지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증과 경증으로 구분하자고 하는 것은 사실 등급제 폐지에 반대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등급제 폐지 논란에서 핵심은 대안이다. 무작정 비인간적이니까 폐지하자고만 주장할 수 없다. 대안도 없이 폐지만을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등급제 폐지에 따른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 장애인복지서비스 전달체계 개편 논의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뚜렷한 대안이 제시되어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대안마련 없이는 등급제 폐지는 불가능하므로 바로 지금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결국 등급제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국가들의 법적체계를 배워 이를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서비스 전반으로 이식하거나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협의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등급제 폐지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해소해가거나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활발한 논의구조가 마련되어야만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등급제를 폐지한다는 의미는 결국 장애인복지법에서 장애유무만을 판단하여 등록제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렇게 법이 개정될 경우 두꺼운 책으로 두 권이나 되는 각종 장애인복지시책에서 등급을 기준으로 제공하는 혜택들부터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

또 장애인복지법과 연계하고 있는 법률, 가령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과 같은 법률의 후속 개정과 그에 따른 제도와 시책의 수정까지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TFT 수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1년에 몇 차례 얼굴보기도 어려운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도 해결할 수 없고, 부처간의 이익을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는 조직에서 상설화된 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해야 할 정도의 대대적인 공사이다.

이제 본격화 되고 있는 장애등급제 폐지. 당장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급하게 마음먹을 것도 없고 무작정 폐지부터 하고 보자는 과격한 주장도 현재로는 도움이 안 된다. 차분히 이해당사자들과 공무원 입법기관 관계자 등이 모여 협의하고 논의해가면서 대안을 마련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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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준 럼리스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국장이자 아시아태평양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 부회장이다. 제3차 아태장애인 10년을 위한 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유엔 에스캅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세계 장애인계의 동향, 뉴스를 소개하며 시사점을 살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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