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며 친지가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사는 얘기와 덕담을 나누는 큰 명절 설. 올해도 어김없이 설을 맞이하여 벌교에 있는 큰댁의 자그마한 전통가옥에는 가장 큰 어른의 자녀, 또 그들의 자녀들까지 어른 십 수 명, 아이 십 수 명이 모였다.

이제는 다들 장성해 각자의 가족을 이룬 사촌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그간 살아온 얘기를 나누는 자리인지라 만날 때마다 늘 즐겁다. 설날이 다가오면서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여느 엄마들과 달리 내 경우는 늘 힘이 되어주는 사촌들과 만날 생각에 오히려 명절이 기대되는 편이다.

그런데 하필 몇 달 동안 가벼운 감기기운 한번 없이 튼튼하게 지내던 주언이가 연휴 첫날부터 갑작스레 고열과 심한 감기증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금새 훌훌 털어버리고 빨리 나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엄마로서 아이에게 당연히 갖는 마음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가족이 많이 모이는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과거 주언이가 지금처럼 건강하지만은 않았던 몇 년 전의 시간들이 문득 떠올랐다.

돌 전의 주언이. 병원에 입원해서 매우 불편한 모습이다. ⓒ이은희

주언이를 낳은 후에는 명절 때마다 뭔지 모르게 조금씩 긴장해야 했었다. 처음 갔을 때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축복어린 인사보다는 큰 병을 앓은 아이 때문에 고생했을 부모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어떻게 자랄 지 불확실한 주언이에 대한 암묵적인 우려가 짐짓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었다.

그 다음에도 늘 어딘가 아팠고 불편해하는 주언이 때문에 모두 같이 마음 놓고 환하게 웃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고, 엄마아빠를 몹시 힘들게 하는 까다롭고 예민한 주언이를 두고 걱정 어린 얘기 한마디를 원치 않아도 꼭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여전히 몸은 불편하지만 몰라보게 건강해지고 밝게 자라는 주언이를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걱정 근심이 아니라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에 대한 고마움과 또한 ‘그동안 잘 키웠구나’라는 칭찬을 같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갈 때마다 더욱 큰 용기를 얻고 더 잘 될거라는, 막연하지만 가슴 뿌듯한 희망도 함께 안고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 정도 회복된 주언이. 간신히 일어나 앉아 창밖의 흰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은희

아이가 다른 어린 조카아이들에게 감기를 옮기지는 않을까, 혹시 감기 증세가 더 심해지지는 않을까 고민 끝에 결국은 아픈 아이를 안고 세배를 갔다. 엄마아빠의 우려와는 달리 아이는 많이 보채지 않고 어른들이 즐겁게 얘기 나누는 것을 얌전하게 바라보다 별 탈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우리 주언이가 많이 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도 좋은 역할을 했겠지만, 엄마아빠 힘들게 하기로는 가히 세계 챔피언감이었는데 어느새 커서 이제는 자신의 아픔을 묵묵히 참아낼 수도 있는 아이가 된 것이다.

만약 아프지 않았더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세배를 했을 것이고, 주언이의 최고 덕담인 “1900년 동안 오래오래 사세요!~”를 날려주었을 것이다.

올해 여섯 살이 된 주언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숫자는 1900이다. 기분이 한껏 업그레이드된 상태에서 “엄마를 1900개나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초콜릿도 “1900개나 먹고 싶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1900이라는 숫자는 ‘하늘땅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졌다.

명절 전날에도 주언이는 어린이집에서 설날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한복을 대충 걸쳐입고 엄마한테 세배를 하면서 환한 표정으로 “1900년 동안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제 곁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것은 모든 자식들의 당연한 바람일 테지만 그 말을 듣던 순간만큼은 울 주언이를 위해서라면 1900년 동안 살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설날이 며칠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주언인 감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이번 감기는 좀 독하고 오래가는 모양이다.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언이만의 환한 얼굴로 다시 돌아와 “1900개나 사랑해!~”를 씩씩한 모습으로 외쳐주었으면 하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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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칼럼리스트
주언이가 보통 아이처럼 건강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회의 여러 구석들과 만나면서 아이 덕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인생을 얻은 엄마 이은희. 가족들과 함께 낯선 땅 영국에서 제3의 인생을 펼쳐가고 있는데...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좌충우돌 일상사를, 영국에서 보내온 그녀의 편지를 통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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