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입지 않아야 할 내 인생의 최대 걸림돌입니까?

어쩔 수 없이 운명이니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장애인이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혹 기뻐하십니까?

장애를 거부하고 장애를 입었으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장애인이 되지 않았으며, 언젠가 의학 등의 도움으로 나을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 장애를 입게 되면 그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며 장애인이 됐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1년 정도가 지나면 장애를 받아들이고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20년이 자나도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장애를 치료할 가능성을 기대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어떤 장애인 동료는 '너는 장애인이 덜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하며, 의학적 모델 속에 갇혀 있다고 놀리기도 한다. 그러나 의학적 치료는 장애를 인정해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장애는 차이가 있을 뿐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 장애인 스스로 '차이'라고만 생각하는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

장애인이 된 내가 차별을 받는 것에는 화가 나고 흥분하게 되지만, 과연 장애인 스스로가 장애를 비정상이나 기능 부족, '상하'의 관계가 아닌 단지 '다름'으로만 인식하고 있을까?

장애의 ‘애’를 사랑으로 생각하고 오래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 스스로는 장애를 사랑하고 있을까? 장애가 있기에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지, 스스로 장애를 사랑하고 장애에 감사하고, 장애를 만족스러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스스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으로부터는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 것일까?

우리는 “나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자포자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타인이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무척 화를 내며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왜 자신에게는 그토록 관대할까?

어느 장애인의 기도가 있었다.

"주님 저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으나 주님은 저를 장애인이 되게 하시어 약자의 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주님은 저를 장애인이 되게 하시어 겸손과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그리고 이 기도의 말미에서는 장애인을 하늘을 빛나게 하는 별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이 기도에서 장애의 반대가 되는 교만과 강함, 능력자 등등은 장애와 반대 개념인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된 것에 진정 감사하고 있는가도 되짚어 볼 문제다.

진정 장애인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조사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조사 과정에서 장애인을 가지고 장난한다고 비난을 받아 조사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심하게 나아가 보면, 스스로 장애인이 되고 싶어 장애인을 택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인으로 살고 싶은 사연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되고자 스스로 택한 사람이나 장애인에 대한 혜택을 받고자 장애를 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애인이 되는 것을 막으면서 대신 장애인이 된 희생자도 있다.

그런데 실제 장애인이 되었으면 그 것도 자기 선택권일까? 실제로는 장애인이 되지 않았는데 서류상 장애인이 되고자 하였다면 그 것은 혜택을 노린 부도덕한 사람일까? 혜택을 바라지 않고 장애인이 되고자 했다면 그 것은 벌을 주어야 할까, 상을 주어야 할까?

과거 여대생이 술집 아가씨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술집 아가씨가 대학에 다닌다면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상을 줘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었다. 문제는 여대생이 먼저인지, 직업여성이 먼저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였고 상과 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결론만 내고 말았다.

장애인이면서 아직도 비장애인일 때의 상상을 하며 그에 따르지 않는 현실을 슬퍼하며 나날을 보낸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장애인이 덜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적 손상이 아니라 정신적 수용으로 진짜 장애인인지가 결정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평소에 손가락 10개라서 기뻐하고 팔이 두 개라서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장애인이라서 굳이 기뻐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그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 된 것을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더 좋긴하였다라고 한다면 장애인 계층이 없으면 더 좋을 것이다라는 우생학적 논리가 남아 잇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애인이 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느냐, 긍정적으로 보느냐의 문제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가의 문제이다.

장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것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의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다. 장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좋으냐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장애는 분명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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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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