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과 수없이 만나게 되고, 그 속에서 때론 기쁨에, 때론 절망에 하릴없이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고, 돌이켜보면 그러한 일들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성숙해져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할 때도 있다.

나는 아들 셋의 엄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어린 아들 둘에 철없는 남편 하나 끼워서 아들 셋이 아니라, 내 배 아파 낳은 사내녀석만 셋을 두었다.

철없던 시절,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 공주처럼 이쁘게 키워야지 했던 막연한 바람은 태중에 있는 막내녀석의 성별을 확인하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졌고, 올해 열한 살, 여섯 살, 네 살이 된 사내녀석들과 어우러져 하루하루 시끌벅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세 아이 모두 나에겐 너무나 특별하고 사랑스럽지만, 특히 둘째 주언이는 태어나 8일째 얻은 뇌수막염으로 또래 친구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나에겐 더욱 특별한 존재다.

주언이가 특별해진 건 그 아이가 또래 아이들과 달라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 엄마의 인생에 그 녀석이 던진 작은 돌맹이 하나가 더없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엄마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큰 아이를 낳고도 워커홀릭으로 살아가던 이상한 엄마였다. 물론 모성애라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아이를 지방에 사시는 친정부모님께 맡기고 늦은 시각까지 일하고 또 따로 시간을 내서 대학원까지 다니던 그저 일만 잘하는 엄마였다.

그러던 중 어렵사리 둘째를 갖게 되었는데, 출산 후 몸을 추스르던 중 청천벽력처럼 아이에게 병이 찾아왔고, 아이는 지금과 같은 장애를 얻게 되었다.

둘째를 낳고도 아이가 웬만큼 자라면 예전처럼 일을 하려고 했던 엄마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장애아이를 키우는 여느 엄마들처럼 병원생활과 재활치료에 종일 매달리게 되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모성애가 생긴 것이 아니라 ‘재활치료’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세상과 수없이 부딪히며 오롯이 엄마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과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엄마는 달라지게 된다. 작은 아이를 안고 종합병원과 치료실을 오가며 엄마가 주워듣는 정보들과, 인터넷을 뒤지며 부지런히 수집한 정보들을 앞에 놓고 어떻게 치료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지를 계획하고,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 수 있을 것인지를 예측한다.

물론 예측한다고 해서 아이가 그러한 방향으로 자라줄 것도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마치 꿈꾸듯 아이의 아빠와 의논하고 계획한다. 그러한 과정에 진정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건강하지 못한 아이를 출산하였다는 내외부의 비난에까지 시달려야 한다.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힘든 상황에 직면한 나는 남편과의 긴 의논 끝에 거주지를 지금 살고 있는 고향 순천으로 옮겼다. 아이가 태어난 지 딱 일년이 된 시점이었다.

치료환경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제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그 때에 이를 종합적으로 진단해주고 어떤 시점에 어떠한 치료가 적절할지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이 주변에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이나마 재정적인 지원이 가능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것은 여전히 꿈 속에서나 가능한 상황이다.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마치 유배된 것만 같은 심정이 된 엄마는 일년 동안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겪었던 경험들을 하나 둘씩 풀어놓으며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로 결심한다. 그 것이 더 이상 워커홀릭이 아닌 엄마의 새로운 일거리였다.

여행정보나 레시피, 상품정보를 제공하는 다른 블로그처럼 많은 사람이 방문하진 않지만 나와 유사한 경험을 이제 막 시작하는 엄마들과 아픔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는 소중한 터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인생을 세상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새로운 고민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내 아이 주언이가 변화시킨 엄마의 현재 모습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세 사내녀석의 엄마가 되었고, 몸이 불편한 한 아이를 두게 되었다. 원치않았던 상황을 원망도 하였지만 그러한 원망도 잠시, 엄마는 이내 새롭게 태어나 알지 못하는 사이 성숙하였다.

누구나 그렇듯,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참 별스럽고 재미난 일들과 만난다. 세 아이를 키우며 생기는 별스런 일들을, 별스럽지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이 곳에서 풀어놓을까 한다. 이 엄마가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터전을 가슴 벅차게 또 하나 가지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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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칼럼리스트
주언이가 보통 아이처럼 건강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회의 여러 구석들과 만나면서 아이 덕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인생을 얻은 엄마 이은희. 가족들과 함께 낯선 땅 영국에서 제3의 인생을 펼쳐가고 있는데...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좌충우돌 일상사를, 영국에서 보내온 그녀의 편지를 통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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