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커피는 꿀물 커피다. 설탕을 듬뿍 넣고 거기다 사랑도 꾹꾹 눌러 두 스푼 더 넣어서. ㅎㅎ ⓒ한옥선

“아~, 엄마 이거 먹어봐? 맛있지? 우리 이거 사자! 엄마.”

“응! 맛있다. 너도 먹어봐 자~, 아~.”

“어머! 어쩜 모녀 사이가 그렇게 좋아요?”

5일마다 우리 동네에 장이 열린다. 그 장에 엄마랑 찬거리를 사러 같이 나갔다가 서로 장보따리 들겠다고 싸우고 맛있는 거 보면 서로 맛보라고 장난치는 엄마와 나를 보고 지나가는 아줌마가 부러운 듯이 말을 건네셨다. 내가 사고 나기 전에는 사이가 분명 좋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이좋았던 우리 모녀지간에도 사고 후 같이 살면서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닥친 적이 있었다.

병원서 퇴원 후 한동안 살면서 엄마와 난 많이 부딪쳤다. 사이가 참 좋았었는데 내가 다치고부터는 엄마가 굉장히 예민해지셨다. 이전에는 그렇게 내가 하는 거라면 다 잘한다고 보기만 했었는데 다치고 나선 내가 청소기를 잡으면 어느 순간 소머즈처럼 달려와 후다닥 청소기를 뺏어 가고,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돌리던 청소기 냅다 던져놓고 주방으로 와서 수세미를 뺏으셨다. 난 연세 많은 엄마 고생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러는데 엄마는 노인네가 하는 게 지저분해보여서 그러나 하고 날 오해하기 시작했고 슬슬 우리모녀 사이에 먹구름이 끼면서 이모랑 속이야기를 전화로 하시던 어느 날 엄마에 속내를 들어버렸다.

“에구 팔자에도 없는 병신자식을 두고 내가 뭔 죄가 많아 그러냐.”

옆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병신자식이라는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크고 아프게 들리던지 정말 욕실에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 놓고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 맘 아플까봐 피가 철철 흘러도 안 아프다고 괜찮다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장애인이란 소리와 병신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천지차이인지 정말 예전에 장애인분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지 그 순간 그 한마디에 그분들에 설움까지 다 내게 밀려왔고 엄마가 많이 힘드시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겨져 나가는 거 같았다.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으셨던 예전과는 달리 전혀 내가 하는 말은 믿지도 않으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시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뭘 하면 그만하시라고 힘드신데 하지마시라고 하면 잔소리로 오해를 하시고 그냥 하시게 두면 몸살이 나도록 하셔서 밤새 끙끙 앓으셨다. 그렇게 뭔가를 하지 않으시면 불안하신지 엄마의 마음도 나에 장애 때문에 조금씩 장애가 생기기 시작하고 시간이 갈수록 엄마도 나도 지쳐갔다.

가족 중 장애인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어쩜 심리적으로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나만 잘 버티면 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걱정했는데 문제는 엄마에게서 나온 것이다. 엄마도 부모도 사람이란 걸, 같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인가 작은 것에도 화를 내기 시작하셨고 드디어 곪아 터졌다.

“엄마 그냥 쉬엄쉬엄 하시고 안 해도 되는 것까지 몸살 나도록 하시지 말아요. 엄마 병나면 어떻게 해. 내가 업고 뛰지도 못하는데?”

그랬더니 엄마는 듣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화를 내시면서 “뭔 잔소리를 또 하려고 그러냐? 너는 왜 내가 하는 모든 걸 사사건건 못마땅해 그러냐 열 받아서 너랑 못 살겠다” 그러시는데 울컥 설움과 미안함에 눈물이 나오는데 울어버리면 상황이 끝날 거 같아 몇 달 동안 힘들었는데 이참에 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엄마, 외할머니한테 예전에 힘든 거 하지 말라고 그러셨지. 엄마가 할머니한테 잔소리하려고 그러셨어? 엄마도 할머니한테 딸이었을 때 생각해봐 나도 그런 심정으로 그런 건데 아니 더 하지 난 내가 아파서 엄마가 고생 하는 거니 더 미안해서 그리고 엄마 이전이랑 많이 다른 거 알어? 다치기 전에는 내 말 뭐든 다 믿어주더니 이젠 안 그러더라고. 내 몸이 다친 거지 내 속 사람도 다친 거 아니야 그리고 난 엄마 진짜진짜 많이 사랑하는데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닌데.”

“내가 그랬냐? 나도 모르겠다. 자꾸 신경질 나고 짜증나고 꼭 잔소리 하는 거 같고 할 줄도 모르면서 한다고 그러니까 느릿느릿 답답하고 다칠까봐 그렇고 저 꼴로 어떻게 사나 싶기도 하구 사람들 보는 것도 싫고 병신 소리 듣는 것도 그렇고 그냥 속상해서 그래 내가 죄가 많아서 그런가 싶고.”

“그냥 사고지 누구 죄 때문이 어디 있어? 그렇게 따지면 죄 없는 사람 없는데 그럼 다 다치나 뭐. 그런 생각 하지 마 잘 될 거야. 우리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엄마 딸 한 번만 믿어봐 응! 병신자식 효도 본다는 옛말 있지? 내가 많이는 못해줘도 속 안상하게 욕 안 먹이고 좋은 딸로 엄마 행복하게 해드릴게 알았지! 우리 기정씨 그 동안 병수발 하느라고 너무 힘들었지? 어디 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맛있는 것도 먹고 아 그리고 엄마 옛날 사람들처럼 이젠 병신이라고 그렇게 안 불러 이젠 장애인이라고 불러 엄마도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들으니 좋지는 않더라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야”

엄마랑 난 그동안 눈치 보느라 속아파도 울지 못한 거 그날 아주 속 시원하게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실컷 울었다. 그리고 나서 서로 쳐다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이 서로 웃겨서 ‘하하’ 그렇게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대화로 몽땅 쏟아놓고 눈물로 박박 닦아버렸다. 다시는 응어리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 날 후로 우리 모녀 사이는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좋다. 믿어 달라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노력하고 운전도 배워서 엄마랑 이웃 할머니들을 모시고 한의원에도 다닌다. 잘나가는 자식 많아도 전화 한 통 없어 아픈지 굶는지도 모른다며 할머니들의 은근 부러워하시는 눈길을 받으시며 내 옆에 앉아서 비온 뒤의 먼지 하나 없는 맑은 하늘같은 얼굴로 웃으시며

“우리 딸이 최고지” 그러신다. 호호호.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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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타인의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이름표 하나 더 가진 욕심 많은 사람. 장애인이 된 후 고통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불평이나 원망보다 감사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얼굴부터 온 몸에 58%의 중증 화상에 흉터들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용감하게 내놓고 다니는 강도가 만나면 도망 갈 무서운 여자. 오프라인 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난다는 것이 어려워 온라인상의 장애인 카페를 통해서 글을 올리면서부터 다른 장애인들과 소통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이 사소한 나의 글 하나에도 웃는 것이 좋아 글 쓰는 것이 취미가 된 행복한 여자입니다. 제가 내세울 학력은 없습니다. 다만 장애인으로 살아온 6년이 가장 소중한 배움에 시간이었고 그 기간 동안에 믿음과 감사와 사랑이 제게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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