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울타리를 벗어나니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더 알찬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한옥선

저녁 무렵, 날이 더운데다가 체온 조절이 아직 어려운 편이라 땀이 나는 곳에는 많이 나고 땀구멍이 없어 안 나는 곳은 열나고 가렵다. 하는 수 없이 차가운 물로 시원하게 해서 열을 내리고 씻기도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로 가서 물을 트니 콸콸 수도꼭지로 물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샤워기랑 트는 방식이 달랐다. 샤워기와 수도꼭지를 변형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을 안한다. 내 손가락이 잘 잡지도 못하고, 잡아도 힘이 그만큼 없어 그만 수도꼭지가 날 이겨버렸다. 이런 된장 고추장 쌈장 같으니라고. 이미 옷을 벗은 터라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물을 몸에 끼얹는 수밖에 없었다.

큰 대야에 물을 틀어 받으며 바가지로 물을 뜨는데 참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손목이 자유로이 돌아가질 않으니 물을 푸는 것도 쉽지 않고 간신히 뜨고 들으니 물이 쏴하고 반이 바닥으로 쏟아져 버린다. 바가지를 잘 잡아야 하는데, 순간 그만 물 무게에 툭 내려지고 보니 물은 다 흘러져 버리고 그나마 붙들고 있던 바가지도 미끄덩하며 날 거부해 버리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도망갔다. 완전 전쟁터가 따로 없는 소리 ‘쏴! 땅! 데구루루!’. 하하.

아무래도 주무시러 들어가신 어머니가 도둑 든지 아시고 놀래서 일어나실라 얼른 바가지 주워서 씻어야지 하고 바가지를 잡으려는데 얘가 날 완전 무시한다. 안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거를 잘 못 잡는데 물이 묻어 더 안 잡히고 요리조리 손가락 사이에서 도망을 가버린다. 으으으 얄미운 바가지 간신히 잡고 보니 에구 온 몸에 땀이 샤워한 거보다 더 하네. 푸하하.

다시 한 바가지는 무리여서 반 바가지만 떠서 붓는데 참 물이 이번엔 날 거부하네. 하하. 팔이 안 구부러지니 물 방향은 애매한 곳만 가서 철썩하고 떨어지고 소리도 크고…. 아, 이건 아닌데 싶어 좀 더 조용히 잘해보자 하고는 물을 떠 다시 시도를 하는 찰라 그만 나도 모르게 쿵하고 앉아 버렸다.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항상 그랬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헉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난 사고 후 바닥에 앉은 적이 거의 없었다. 어디를 가도 의자나 침대에 앉았고 어쩔 수 없이 정말 앉아야만 하는 상황에는 사람들이 부축을 해줘서 간신히 앉고 섰다. 그런 내가 지금 그것도 혼자서 앉아버린 것이다. 기적 같은 순간이다. 앉는 순간까지도 난 내가 못 앉는 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맙소사.

집에서나 어디를 가나 늘 못 앉는다는 생각이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고, 나도 다리가 말을 안 들어 아프기도 해서 못했는데, 아니 그러면 큰 일 나는 줄알았는데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 생겼다. 이제 어떻게 일어나지란 생각에, 내가 앉았다는 그것도 혼자 앉았다는 그 기쁨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우리 집 같아야 “엄마”하고 불러서 도와 달라고나 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부르자니 지금 내 모습이 영 아니고, 같은 여자인 어머니를 부르자니 나오셔서 열쇠로 여시느라 열쇠 찾으라고 그 사람을 부를 것 같아 대략난감이다.

정말 이 상황이 기뻐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울어버릴 상황이 됐다. 가만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자 내가 어떻게 앉았지’ 생각을 해보니 잘하면 난리를 치르지 않고 일어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욕조에 펴지지 않는 팔꿈치를 대고 힘을 주어 상체를 버티고 다리를 얼른 일으키면 되겠지 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팔꿈치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다. 피부가 거의 다 손상되어 이식한 곳이라 약해서 딱딱한 욕조에 뼈가 그대로 눌리니 너무 아프다. 그래도 빨리 하지 않으면 무슨 일 일어난 줄 알고 그 사람이 밖에서 부를 거 같아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며 드디어 다리를 움직이는데 우두 두둑하며 그 오랜 시간 앉지 못했다 갑자기 앉은 충격에 무릎 뼈에서 아주 부서지는 소리가 무섭게 난다. ‘혹시 이거 부러진 거 아냐’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이 다리 저 다리 움직여 중심을 잡으며 몸을 세우려는데 쉽지가 않다. 이러다 밤새겠다. 그래도 누굴 부르긴 싫었다. 몇 번에 걸쳐 이 자세 저 자세를 해봤다. 몇 번 시도 끝에 한번 넘어질 뻔 하긴 했지만 일어나졌다. ‘야호’하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꼭 아기들이 걸음마 하기 전, 풀썩 주저앉고를 몇 번 반복하다 혼자서 일어서서 좋아하고 신나하는 그 모습이 아마 그때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물 밖 세상으로 나오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환경과 일에 부딪혀 아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내 모습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에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어쩜 하나님이 겁 많은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감사해서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났다.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도 하지만 성장시키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 그 위대한 힘을 난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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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타인의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이름표 하나 더 가진 욕심 많은 사람. 장애인이 된 후 고통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불평이나 원망보다 감사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얼굴부터 온 몸에 58%의 중증 화상에 흉터들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용감하게 내놓고 다니는 강도가 만나면 도망 갈 무서운 여자. 오프라인 상에서 장애인들을 만난다는 것이 어려워 온라인상의 장애인 카페를 통해서 글을 올리면서부터 다른 장애인들과 소통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삶이 사소한 나의 글 하나에도 웃는 것이 좋아 글 쓰는 것이 취미가 된 행복한 여자입니다. 제가 내세울 학력은 없습니다. 다만 장애인으로 살아온 6년이 가장 소중한 배움에 시간이었고 그 기간 동안에 믿음과 감사와 사랑이 제게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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