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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에서 쫓겨나(?) 활동가가 되기까지

내가 본 시설…주기적으로 구타하고 호적파서 수급자 만들고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0-03-19 11:14:29
그룹홈에 입소하다

2003년 2월 퇴원 후, 오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증장애인이었다. 집에 있는 3일 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고 가족의 지인이 알아봐준 비인가 시설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룹홈의 형태를 띤 시설이었다. 원장은 전도사라 했고 원장의 부인은 지체장애인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감동적인 사례로 매스컴에 꽤 여러 번 보도된 듯했다. 입소자는 넘쳐났고 시설은 열악했지만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도 않는 개인이 이렇게 장애인을 돕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견디기로 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발달장애인, 특히 장애청소년이 많은 시설에서 내가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처음 일주일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런 내색을 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싶어서 지적장애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쳐보려고 했다.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지적장애의 특성에 대해서도 전무했던 터라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반에서 언행이 조금 다르고 고집이 남달랐던 친구들이 지적장애인이라는 것도 그곳에 가서야 처음 알았다. 지적장애와 발달장애를 동시에 가진 언니를 보며 옛날 같으면 저런 사람을 내가 ‘미친 여자’ 쯤으로 폄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장애든 지적장애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 것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관리가 구타라니

시일이 조금 지나 지적장애와 발달장애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과 소통하는 법도 깨우쳤다. 비인가시설이라지만 꽤 알려진 곳이어서 끊임없이 방문하는 봉사자들의 시선에도 익숙해졌다. 그들이 베푸는 ‘봉사활동!’과 그들이 보내는 ‘동정심!’에도 익숙해지려고 했다. 그 와중에 시설 내에서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말 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립된 섬에서 찾은 탈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지적장애와 발달장애를 동시에 가진 장애청소년이 원장이 뜻하는 대로 통제되지 않자 정말 비오는 날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구타당했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나중에 원장은 “얘들은 한 번씩 이렇게 해야 말을 듣지 안 그럼 구제불능”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그렇게 ‘관리’당했다. ‘구타’라고 표현한 것은 체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타’였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손에 들고 몸 여기저기를 때리는 원장의 모습은 정말 충격과 공포였다. “얘들은 잊을 만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한낱 입소자에 지나지 않았기에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네들은 봉사한다면서 입소가 무료라고 했지만 집에서는 한 달에 얼마씩 비용을 내고 있었다. 강제라기 보단 그냥 고마운 마음에 내는 일종의 실비였다. 그러던 중 원장과 사모가 말했다. “왜 수급자로 등록하지 않느냐”고. “수급자요?” “그럼 수급비 나오잖아” “전 부모가 있는데 어떻게…” “그럼 호적을 파면되지. 호적 파면 장애인이라 무조건 수급자 할 수 있어.” 호적을 파서 수급자로 만들라고?

호적을 파서 수급자로?

가까워진 시설 상주자한테 말하고 나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 있는 장애인들은 모두 수급자이고 그 통장은 사모가 관리하고 있다고. 하아, 우리 집에서 내는 비용으론 성에 안차니 수급자 통장을 만들어서 바쳐라. 호적을 파서라도 수급자 자격을 만들어라. 그들이 뭔데 호적을 파라는 건가. 내가 수긍하지 않자 지속적으로 호적을 파서 수급자를 만들라는 강요가 들어왔고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원장내외의 불편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그곳에 지적장애중학생 딸 2명, 비장애초등학생 딸 1명 이렇게 세 딸과 살고 있는 지적장애여성의 경우였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의 빨래부터 식사준비까지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그 지적장애여성의 임금통장 및 수급통장까지 모두 사모가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말로는 나중에 애들 시집갈 때 모은 돈을 내어주겠다 했다지만 실제 임금통장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상주자로부터 들은 황당한 사실은 그곳에 더 이상 정을 붙일 수 없게 만든 대신 뭔가 비밀을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그와 더 가까워졌다. 결국 여름 즈음 연애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뒷마당에서 같이 담배도 피우고 옥상에 올라가서 넋두리도 하고 몰래 외출을 하기도 했다. 그가 밀어주는 수동휠체어에서 사람들이 보내는 익숙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것도 당시엔 참을 수 있었다.

몰래 외출을 한 어느 날, 누군가 잠에서 깨서 날 찾았고 결국 우리의 연애는 들통 나고 말았다. 들통 난 연애의 후유증은 시설 퇴소였다. 이유는 연애란 있을 수 없으며 아이들에게 보기 안 좋다, 였다. 장애인은 사람 아닌가? 연애도 하면 안 되나? 결혼해 분가한 장애인도 있다면서 연애금지라니!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호적을 파지 않아 수급자 통장을 챙길 수 없으며 봉사자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탐탁찮았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자 결국 꼬투리를 잡아 내쫓은 것이었다.

집으로 쫓겨 와 몇 년이 지나고 지금 나는 장애인 활동가가 되었다. 활동가의 길을 택하기까지 그 비인가시설에의 경험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적장애인의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과정을 목격하고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비인가시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인권유린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리라. 앞으로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난 전동스쿠터를 타고 단체로 출근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박현희는 장애여성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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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박현희 (graymenta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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