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 언니가 여섯 명이에요~

나는 일곱 자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가족 조사 쓰는 칸이 모자라서 칸을 따로 그려서 채우거나 언니 두 명 정도는 안 적기도 했다, 이 같은 일을 겪으면서 사춘기 때는 남들에게 언니가 여섯 명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또래 사람 중에 형제가 많은 경우는 드문 일이기에, 언니가 여섯 명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동시에 당황해 하면서 그걸 감추려고 여러 가지 말들을 해 온다.

“어머 일곱째라고요? 어머님이 고생이 많았겠어요? 딸 일곱에 장애가 있는 딸이라니….”

“그래도 막내라서 귀여움 받고 컸겠어~ 부럽다~” 등 대부분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 어려서는 사람들에 이런 반응들이 싫어서 언니 3~4명을 줄여서 말하기도 하고 결혼하는 언니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줄어서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딸 일곱 중에 아들 한 명 못 낳고 장애를 가진 딸까지 낳아 기르는 우리 엄마 혹은 우리 가족을 매우 불행한 가족으로 바라보거나 또는 비상식적으로 비치는 것만 같아 너무 불편했고 부끄럽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언제나 형제가 몇 명이냐고 물어오면 인상부터 구겨지고 큰 용기를 내서야 언니가 여섯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애여성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여성주의를 공부하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대를 이어줄 아들이 필요했고 엄마는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언니들을 감추는 것은 딸 일곱을 낳고 나까지 키워 오시느냐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당당하게 ‘저 언니가 여섯 명이에요~ 좀 많죠? ^^'라고 말한다.

2.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 이방인으로서의 나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아무리 가족이 원수 같아도 저마다 가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환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아버지의 잦은 가정폭력 때문일 수도 있고 아들을 못 낳았단 이유로 어머님에 대한 할머니에 고된 시집살이를 옆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비장애 언니들과 그다지 친밀감을 쌓지 못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항상 가족행사에서 제외 대상이 되어 다섯 명 언니의 결혼식 때도, 아버지 환갑잔치 때도,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에도 나는 없다. 우리 가족은 원래 여덟 명인 것처럼 휠체어 탄 내 모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언니들 명수를 말하길 주저했듯이 우리 가족들도 내가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을까. 하지만 행사 끝나고 갖다 주는 음식들은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뷔페 음식이라고 해도 언제나 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다.

사실 독립하기 전까지 가족들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다. 나는 늘 내 결정권을 존중해 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고 대립상태가 되어 이성적인 판단보단 감정이 앞서서 소리부터 지르고는 한다. 항상 그렇듯이 내 의견은 무시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감정부터 앞서는 것 같다. 우리 가족들에게 나는 고집불통에 성질 더러운 애로 인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독립을 한 뒤부터 가족하고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중증장애를 가진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란 생각을 해 왔는데 단체 상근활동비를 받으며 경제적인 독립을 하였고 한 달도 못 버틸 것 같았는데 몇 년째 혼자 살아가는 모습 보며 가족들도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어머님은 나에 대한 지지자가 되셔서 내 의견을 존중해 주고 지원도 아끼지 않으신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도, 나도 서로에게 주었던 부담감을 내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다시 나를 가족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건강이 나빠지면서 병원이란 곳에 가게 되어 뜻하지 않는 수술 탓에 내 모든 상황과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동안 독립된 가족과의 관계는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와 함께 병원에서는 활동보조 지원이 안 되는 제도 때문에 편찮으신 어머님이 간병을 하며 난 다시 가족들에 보살핌이 필요로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무리 지인들이 일주일 한 번씩 와서 도와줘도 내겐 일주일 내내 간병할 사람이 필요했고, 늘어나는 병원비를 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 누군가는 가족이었다. 혈연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고 가족이 없다 해도 지원받을만한 제도적 장치는 찾기 어렵다.

그렇게 병원생활을 경험하고 현재 나는 가족들을 귀찮게 하고 있다. 독립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현재 상황을 인식하면서 가족들 일상에 내가 걸쳐져 있음을 인지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아무리 진보적인 삶을 꿈 꿔도 내 삶은 장애란 틀 안에서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더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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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 나이는 서른 살에 접어들었습니다. 가족들 곁을 떠나서 혼자 독립을 시작한지 6년째 되어갑니다. 남들은 저한데 ‘너 참 까칠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럼 저는 ‘이 까칠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까칠해질 수밖에 없다고!’라고 답합니다. 이 칼럼을 통해 중증장애여성으로 까칠하게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삶의 대한 고민을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앞으로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과 함께 공감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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