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에 게재되었던 '배뿔뚜기'님의 사진과 관련하여, 게재과정에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한 점과 사진 설명을 ‘구걸하는 노인’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에 대하여 '배뿔뚜기'님께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지난 주 세종로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날 때였다. 반백의 노인이 다가와 모금함을 쓱 내민다. 애원의 눈초리, 모금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모금함에 적힌 'ㅇㅇㅇ노인회'라는 단체명이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그 노인은 농인(聾人)이 분명하다.

내가 주저하자 농인은 모금함을 내게 더 가까이 들이댔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수화로 농인에게 "모금+불법"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농인은 당황해하며 황급히 돌아섰다. 황망히 돌아서는 농인을 보며 굳이 야박하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불편함 때문일까, 농인은 신호등이 켜지자마자 반대편으로 빠르게 건너간다. 그런 농인을 보며 문득 20년 전, 대구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만났던 농인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그 농인의 이름과 사는 곳을 물어보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중년이었음에도 눈에 띌 정도로 예뻤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내가 기차를 실물로 처음 본 것은 20대가 되어서였다. 섬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기차를 볼 기회가 없었다. 마을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많지 않아 기차가 나오는 화면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어렸을 때 기차하면 생각나는 것은 ‘뿌우-’하는 기적소리와 하얀 증기를 내뿜는 모습이 전부였다. 가끔은 기차가 보고 싶어 책 속의 그림들을 뒤적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꿈속에 기차가 보였다. 그 시절 꾸었던 꿈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기차소리를 쫓아 산 아래로 내려오다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뱀처럼 산모퉁이를 기어가는 기차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꿈이다.

20대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기차를 탈 기회가 생겼다. 같은 직장을 다니던 동료가 대구로 이사를 갔는데 어느 날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자기 집에 초대하니 주말에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차를 탄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서울역으로 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을 때라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지금은 완행열차가 없어져 추억 속에만 남아있다) 표를 끊었다. 그래도 기차를 탄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기차는 내가 생각해오던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날이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빈 좌석을 둘러싼 입석 손님들의 쟁탈전이 치열했다.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느라, 싸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계란이나 맥주, 땅콩, 과자 등 군것질감을 파는 상인이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갔다. 몇 정거장을 지나자 급행열차를 보내기 위해 기차가 멎었다. 하지만 멎은 열차는 10분이 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안내방송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방송만 나왔다. 그때 사람들로 붐비는 객실 문을 열고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다. 중년이었음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미모의 여자였다. 객실로 들어온 그 여자는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서 있는 승객들에게 돌아가며 무엇을 적은 종이와 함께 볼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도 다가와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자신은 듣지 못하는 농인이라는 것과 남편이 몇 년 전 죽어 생계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 싶지만 받아주는 데도 없어 할 수 없이 볼펜을 팔러 다닌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알 수 없는 손짓을 하였다. 그것은 수화이고 볼펜을 사달라는 것이라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장애인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대화가 안 통하는 농인을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검정색 볼펜 한 자루를 집었다. 그리고 잔돈을 뒤질 때 그 여자는 종이에 적힌 볼펜 값을 내게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종이에는 그때 당시 볼펜 한 자루 값의 5-6배에 가까운 액수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 액수는 나에게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벌어진 상황을 수습할 수 없어 나는 그 여자가 요구하는 돈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볼펜을 파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볼펜을 파는 상행위가 아니라 모금행위를 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종이에 적힌 문구를 생각하곤 그 여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객실을 한 바퀴 돌고 다른 객실로 건너가려는 그 여자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볼펜 한 자루를 더 달라고 했다. 그 여자는 나의 호의에 감사하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볼펜 값을 치르고 나는 종이에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 사느냐,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등 몇 가지를 적어 그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 여자는 거리낌 없이 내가 내민 종이에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짤막하게 적어 주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우연치 않게 수화를 배우게 되었다. 기차에서 만난 농인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수화를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수화를 배우면서 수업에 참관하는 농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들과의 어울림의 대부분은 퇴근 후 저녁에 포장마차에서 이루어졌다. 그때 만났던 농인 대부분은 직장이 없었다. 그들은 젊었고, 건강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빌린다면 회사에서는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길거리 노점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가끔 막노동을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만나는 농인들 중에는 한참 동안 안보이다가 나타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다른 농인들에 비해 궁핍해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날 한동안 안보이다가 모습을 드러낸 농인에게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농인은 나에게 시골로 장사를 갔다 왔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그에게 무슨 장사를 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듯 장사하는 물건이라며 볼펜이며 간단한 생필품을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기차에서 만났던 농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주변의 농인들이 말하던 장사라는 것이 생필품을 판다는 빌미로 하고 있는 모급행위라는 것을. 서울에서 모금이 쉽지 않으므로 순박한 시골 인심에 기대어 시골 집집마다 다니며, 혹은 길거리에서 모금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은 농인들의 모금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본 농인과 같이 지금도 모금을 하는 농인들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중국 농인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불법모금을 하고 있다는 기사도 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역의 장애인 간부가 조직적인 모금을 해왔으며, 모금을 한 돈의 일부를 상납을 받아오다가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일전에 어느 농인과 관련한 자조단체에서 한푼 두푼 모금한 돈으로 나이든 농인들에게 겨울 내복이며 쌀이며 나누어 주던 모습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농인들이 하는 길거리 모금이 사용처가 투명하고 모금의 목적이 정당하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길거리 모금이나 농인들이 하는 모금이 법으로 정한 테두리에서 벗어났다고 비난을 할 수도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농인들에게 안정된 취업의 길은 너무 멀다. 설령 취업하더라도 비장애인에 비하여 근로조건이 열악하다. 이렇게 본다면 비난해야 할 대상은 모금을 하는 농인들이 아니라 모금을 하는 행위를 방치하거나, 모금을 할 수 밖에 없도록 길거리로 내보는 정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황망히 광화문 사거리 건널목을 건너는 농인을 보며 20년 전 기차에서 만났던 전 그 농인 여자를 생각한다, 20년이 지났으니 그 여자도 지금쯤 반백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보기에 그 여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에 어려운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생계를 위하여 길거리에서 혹은 대중이 이용하는 공간에서 모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올 겨울은 국제적인 경제 한파로 유난히 춥다. 더욱이 새해 장애인관련 예산이 삭감된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정말 추운 겨울이 될 것 같다. 볼펜을 팔러 다니던 20년 전 그 여자, 추위는 혹독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겨울을 맞았으면 하는 애틋한 바람으로 두 손을 모아본다.

볼펜을 팔러 다닌다

가다가 졸고 졸다가 가는 완행열차

“심심풀이 땅콩이나 맥주 있어요”

판매원의 목소리 덜컹덜컹 지나가고

‘도와주세요.

듣지 못하는 농아입니다.

남편이 죽고 일자리가 없어서...‘

눈물 몇 방을 가볍게 찍은 글귀

명찰처럼 목에다 걸고

허공으로

손말을 풀어놓는 여자

몇몇은 눈을 감고,

주머니의 잔돈을 뒤지고,

힐끔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차고,

아직은 젊은 그녀 볼펜을 팔러 다닌다

땀 흘릴 노동 받아주지 않는 사회를

원망하듯 분(粉)도 지우고

허름하게

옷도 고쳐 입고서

가다가 졸고 졸다가 가는 복지국가에서

장애를 팔러 다닌다

- 김철환, 「볼펜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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