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10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 꽃동네 방문 반대 기자회견 모습. (사진 제공 정중규)

2014년 4월 16일, 계절이 봄의 절정으로 치닫던 그날,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세월호와 함께 봄을 잃어버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생떼 같은 학생들 수백 명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묻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의 탐욕과 관료의 부패,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함으로 점철된 세월호 참사는 이제까지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쌓아 온 성장 신화의 바벨탑이 붕괴되고 있음을 뼈아프게 알려 주었다.

그런 바벨탑은 그동안 사회 곳곳에도 세워졌는데, 복지 사업 분야의 성장 신화 그 대표적 바벨탑은 꽃동네이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결사반대하는 작은 예수회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꽃동네는 사회복지 자본이자 사유화된 형태의 거대 종교 시설이며 꽃동네의 운영 주체인 (재)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이사장인 오웅진 신부가 자신과 친인척, 수도자들 명의로 전국 각지에 보유한 부동산만 400만 평이 넘고 음성과 가평에 있는 꽃동네 두 곳에 지원되는 정부 예산만 연간 380억 원에 이른다. 이러한 막대한 혈세와 80만 명에 이르는 후원자들의 후원금 및 신도들의 성금으로 구축된 이 대규모 수용 시설에서, 수많은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다 생을 마감하고 있다.

또한 오웅진 신부는 이렇게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이미 2003년에 부동산실명제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기소된 바 있다. 그리고 또한 작년에도 마찬가지로 부동산실명제 위반과 국고보조금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을 당한 바 있다. 이런 마피아적 예산 독점과 사회 격리 장애인 수용 시설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는 것은 오웅진 신부 방식의 장애인 복지 사업을 용인해 주는 것은 물론 꽃동네의 부패 스캔들을 사면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에게 이제껏 가해진 모든 억압과 학대 그 차별에 도덕적 정당화를 부여할 위험성도 충분히 있다"는 비판은 꽃동네의 지금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꽃동네를 비롯한 대규모 수용 시설이 국내에서 설립되고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전두환 정권이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행려자들을 대거 수용 시설로 보내면서,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고 기업·종교 단체와 같은 민간 역할을 확대하는 복지 혼합·복지 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종교계 복지 시설들에 대한 예산 지원을 대폭 늘리면서이다.

나는 늘 이 점을 오히려 그리스도 교회의 복지 시설이 고유 영성을 잃어버린 근본 원인이라고 보고 안타까워한다. 그런 국가 예산을 지원받으면서 초기의 첫사랑 같은 마음을 잃어버리고 규모에 집착하게 되고, 수용자들을 '관리'하는 시설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최악의 결과물이었지만, 그리스도 교회의 대규모 복지 시설들도 수용의 대가로 예산 지원을 받으면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나갔다.

그 당시부터 시작된 병폐가 아직도 한국 장애인 복지, 특히 그 당시부터 모범적으로 여겨져 국가로부터 대거 위탁을 받았던 그리스도교 장애인 복지 시설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고 본다. 꽃동네 역시 기묘하게도 대규모 수용 시설 내에 사회복지 전문 현도대학교(현 꽃동네대학교)까지 거느리면서도, 시대에 뒤떨어진 장애인 복지 사업을 계속할 뿐 아니라 복지 시설 규모의 무한 확장과 확대에만 골몰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장애인을 대하는 자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그 시대에 격리되고 소외당한 장애인들을 찾아가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을 복음 선포와 함께 자신의 핵심 과업으로 삼았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치유 행위는 그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데 교회와 성직자들이 장애인 복지를 격리 수용하는 자선 사업으로 왜곡시켜 온 것이다. 대규모 수용 시설에 장애인들을 가둬 놓고 그들의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꽃동네 오웅진 신부 방식은 예수의 복지 정신 그 실천적 모범에도 어긋나는 반예수적 장애인 복지라 아니 할 수 없다.

꽃동네의 그런 왜곡을 나는 꽃동네가 행려자 시설로 시작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전두환 정권의 행려자 소탕 작전 덕분에 대규모 행려자 수용 시설로 급속 성장하게 된 꽃동네는 그 후 사업 영역을 장애인 복지 분야로까지 확대시켜 가는데, 행려자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장애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 문제였다. 특히 행려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버려진 이들을 데려오는 것으로 기존의 대상자를 찾아내 수용하는 것이지만, 꽃동네에 맡겨지는 장애인의 경우는 대체적으로 가정에서(가족들에 의해 무의탁자로 만들어져) 의도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이니 결국 수용 대상자를 애써 만든 꼴이니, 이 점이 결과적으로 사회 통합과 자립을 목표로 삼는 장애인 복지 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세계적으로 장애인 복지의 추세가 사회 통합과 자립 생활을 지향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의 장애인 복지는 대규모 수용 시설 중심이고 예산의 많은 부분이 거기에 집중되고 있다. 대규모 수용 시설을 관리 운영하는 데 투입하는 막대한 예산을 선진국에서처럼 재가 장애인들에게로 돌린다면 장애인 복지의 질적 수준이 올라갈 뿐 아니라 장애인 개인의 삶의 질 역시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또 그것이 "스스로 살게 하라"는 장애인 복지 정신이며, 당연히 국가는 그런 측면으로 장애인들의 삶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가 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대규모 수용 시설들이 장애인들이 사회와 통합해 자립하는 데 국가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꽃동네는 한국 가톨릭 장애인 복지의 얼굴로서 가톨릭 장애인 복지의 발전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장애인 복지 시설 자체가 소규모화 되고 지역사회 친화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에서 꽃동네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대규모 장애인 수용 시설의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 교황의 꽃동네 방문은 장애인을 다시 가두는 것" 한겨레 신문 인터뷰 (사진 제공 정중규)

물론 나는 꽃동네를 완전히 폐쇄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시설, 곧 물적 자원은 얼마든지 관리자의 마인드에 따라 용도를 달리해 쓸 수 있다. 꽃동네는 거기 수용된 장애인들은 모두 풀어 주고서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이라 비판을 받는 장애인 복지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기존의 장애인 복지 시설을 노인이나 말기 암 환자 같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노인 요양 시설이나 호스피스 시설로 전환하여 사업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꽃동네가 지닌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이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어져 한국의 사회복지 분야에 또 다른 역할로 기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오웅진 신부는 바벨탑을 더욱 견고히 쌓고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초청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꽃동네의 문제점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개혁적 교황이 그 발걸음만으로 꽃동네 개혁의 불씨를 당긴 꼴이다. 특히 지난해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소외된 이들의 사회 통합을 거듭 강조한 교황의 주파수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의 장애인 복지가 꽃동네로 대표되는 대규모 수용 시설 위주에서 사회 통합적 복지로 전환되면서 장애인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정중규 /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