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흙으로 난 자와 하늘로 난 자 두 사람 이야기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642020-10-02 오전 7:21:00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흙으로 난 자와 하늘로 난 자 두 사람 이야기.-

 

-.정낙원 목사

 

 

 

오늘은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같은 사람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창조의 모습과 시점을 보면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이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같다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모순적으로 기록하였을 리가 만무합니다.

성경 무오설을 믿는 성도로서는 성경이 틀렸을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불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괜히 따지다가는 불경죄에 걸리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식으로 넘겨 왔습니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목사님들도 이러한 부분은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성령께서 성경을 모순적으로 기록을 하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뜻을 우리 식으로 곡해하여서 이해하고는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드라마를 보면 현재의 결론을 먼저 말하고 난 후에 과거에서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기법이 있습니다.

주로 사극에서 많아 활용하는 기법입니다.

현재의 배경이 과거에 이러한 과정들을 겪어서 온 것이라는 것을 풀어가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러한 식으로 전개를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훨씬 유익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아담을 먼저 창조 하시고 난 후에 여자는 나중에 창조 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독자적으로 창조가 되었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여자가 아담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에게서 사람이 나왔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창세기 2장은 인류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인류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 하면 사람이 사람을 낳는 방식으로 시작 되었고 그렇게 인류 역사는 전개가 되어집니다.

 

여기에 복음적인 큰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짐승이 짐승을 낳습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오고, 짐승에게서 짐승이 나옵니다.

 

당연한 것을 무슨 큰 비밀이라도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 하느냐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당연한 것인데 큰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성경이 말하는 사람과 짐승을 알면 풀려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에덴동산에게 추방당한 후에 태어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형상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지 않는 사람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죄인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짐승입니다.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정의 하십니다.

 

아담은 죄인입니다.

그럼 아담이 낳은 자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위는 천국을 말하고, 아래는 지옥을 말합니다.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갑니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이 천국에 가고,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지옥에 갑니다.

한 마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천국에 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을 사람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은 하나님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짐승으로 보시고 짐승이 살아가는 나라인 지옥으로 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이 사는 에덴동산 바깥의 땅으로 쫓아 낸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살아가는 에덴동산 바깥이 바로 짐승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을 무덤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무덤 속에 있던 자들에게서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나아오고,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짐승이 사람이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새로운 창조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는 새로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시는 모든 일은 창조에 속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살아난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일컬어 보이지 아니 하시는 근본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어떤 자식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 육신을 입은 아들로 보내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라는 이름을 받고 세상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인간들은 가짜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 앞에 서서 보니까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 것입니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동안 짐승이 사람 행세를 한 것입니다.

 

짐승이 어떤 자입니까?

자기 밥그릇을 빼앗으면 어미 아비도 모르고 죽이는 자들입니다.

참 사람이 오자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 반발을 합니다.

급기야 짐승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빛이 어둠에 비취자 어둠이 자기 정체가 드러나니까 빛을 미워하더라고 합니다.

가짜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자기 정체가 발각이 되자 짐승 짓을 한 것입니다.

자기 정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은 줄 알았는데 도리어 죽을 줄 알았던 사람이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은 짐승들이 사람이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을 삼켰는데 나중에 보니까 삼킴을 당한 생명이 도리어 사망을 삼키고 생명으로 창조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참 사람인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을 낳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 사람인 예수님을 짐승에게 잡아먹힘 당하게 함으로서 예수님을 먹은 짐승을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을 사람 만드는 새 창조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짐승의 밥통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 아들을 짐승들의 밥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고백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먹고 살아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욕을 하면서 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가지고 참 사람을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냐?

그 아들을 짐승의 밥으로 주어서 하십니다.

그 아들을 먹은 자는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창조가 됩니다.

참 사람이 죽어서 사람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후에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들이 살아가는 이 땅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짐승이 된 아담과 하와가 짐승을 낳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오는 자들은 모두가 사람이 아니고 짐승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인데 사람이 짐승을 하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를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뱀이라는 짐승의 미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서 짐승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짐승의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는 짐승이 짐승을 낳는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세상을 짐승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진 자들에게 말씀이신 하나님을 보내서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 분이 바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낳아진 자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이 되어서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이 낳아지고,

짐승에게서 짐승이 나아집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이 된 자들이 모인 교회에 맡겨 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짐승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먹으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럼 그 말을 듣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그 짐승들이 바로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만이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창조가 됩니까?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부터 됩니다.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아 주면서부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의 창조가 일어나는 날은 창세기 1장에서 몇째 날에 일어났습니까?

여섯째 날입니다.

 

그럼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아직까지 여섯째 날이 이르지 않음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야지만 짐승으로 남아 있을 자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되는 사람이 될 자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섯째 날에 짐승과 사람이 같이 창조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 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자들이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때를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이라는 뜻입니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들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 나라에 소속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예표 하는 교회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를 예표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자들이 일곱째 날에 교회로 모여서 천국에서 행하는 일들을 미리 이 세상에서 맛보고 예행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것도 일곱째 날 안식일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걸 약속의 보증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주일에 교회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요일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지금이 여섯째 날인 것입니다.

그것도 여섯째 날이 다 끝나가는 저녁때입니다.

이를 말세지말 이라고 합니다.

곧 일곱째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재림 하시면 일곱째 날이 됩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창세기 2장이 먼저이고 창세기 1장이 나중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책의 목차와 같습니다.

목차 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의 목차 속에 담긴 내용들을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풀어가는 것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목차 속에 책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시작과 끝을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의 목차가 담고 있는 내용이 끝이 나기까지는 2장부터는 시차를 두고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제로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이미 이루어졌고,

어떤 것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어떤 것은 장차 이루어지는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이 있고,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이 있고,

장차 이루어질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현재 구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이고,

미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십니다.

 

과거 구원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현재 구원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미래 구원은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재림 하여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의 삼직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십니다.

 

육체로 오셔서 선지자직을 행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제사장직을 행하고 계시며,

재림하시면 만왕의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러면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 안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안식하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들들을 낳고 기르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지금까지 예고편으로 전체를 잠간 보여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예고편 전체를 확대하여서 대하드라마로 풀어 가겠습니다.

그럼 창세전부터 계획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언약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는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한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송을 다른 말로 감사라고 합니다.

 

감사는 모든 일의 끝에 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수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분에게 하는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해 주신 분에게 하는 최종의 행위인 것입니다.

 

찬송을 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구원의 과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은 일곱째 날에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여섯째 날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여섯째 날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찬송을 받고자 함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입니다.

계획에서부터 이루시는 것과 완성한 것 모두를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십니다.

 

우리는 혜택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일을 창조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어 가시는 것이 역사 속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흐름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는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를 합니다.

설계도에는 이미 완성된 집으로 있습니다.

 

하지만 설계도대로 만들어 가는 것은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터를 닦고 그 다음에는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고 그것이 다 하고 나면 지붕을 덮어서 완성을 합니다.

다 완성이 되면 그 집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천지와 만물이 완성되는 수순이 그러합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순차적으로 시간 속에서 진행이 되어 갑니다.

첫째 날이 시작이라고 하면 여섯째 날은 마지막입니다.

 

일곱째 날은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하는 알이므로 실제로 일하는 것은 여섯째 날이 마지막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실제로 이 세상 역사가 끝이 나는 날은 여섯째 날이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창조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은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어 가는 일의 순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의 역사의 끝인 여섯째 날에 창조가 된 사람과 창세기 2장에서 역사의 시작에 창조가 된 사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맨 마지막에 창조가 된 사람하고 처음 시작하면서 창조가 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동안 배워왔던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는 해석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역사의 시작을 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사람은 역사의 문을 닫는 사람입니다.

그럼 이 두 사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그리하여 합당한 답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도 성경의 증거를 받는 답이라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그 답을 추적해 가 봅시다.

 

창세기 1장에는 천지만물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태초에 역사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세계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십니다.

창조의 맨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창조가 되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의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역사의 끝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살펴봅시다.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이 창세기 1장의 모습과 창세기 2장의 모습이 전혀 다름을 보게 됩니다.

천지만물과 짐승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 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모든 짐승들을 다 만드시고 난 후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을 먼저 만드시고 난 후에 각종 짐승들을 만들었다고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짐승 창조가 먼저이고 사람 창조가 나중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 창조가 먼저이고 짐승 창조가 나중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창세기 1장과 2장을 수평적으로 연속적으로 보았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였어도 창세기 1장은 개괄적인 것을 말하고, 창세기 2장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여 왔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주석가들이 그렇게 설명을 하였고 그 주석을 토대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입니다.

계시는 점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은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이를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계시의 점진성이라 함은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형제가 점점 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또한 확대 되어서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론에서는 결론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하여도 희미하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하던 것들이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교리적인 것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적인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예언은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확대가 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희미하게 해석하여도 흠이 되지 않지만 그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희미하게 해석하여서는 안 됩니다.

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모든 성경이 응해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희미하던 과거적 해석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나 예언적인 면에서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희미해서 상징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실제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때이므로 밝히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상징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제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의 점진성을 믿는 성도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성경 해석의 원리입니다.

 

곡식을 추수 할 때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탈곡을 하여서 가마니에 담습니다.

가마니에 담을 때는 곡식과 가라지를 세세하게 구분하지 않고 담습니다.

그러나 양식으로 먹기 위해서 정미를 할 때는 곡식과 가라지를 선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 1장과 2장을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순서적으로 연결하여서 이해하여 온 것은 가마니에 쓸어 담을 때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을 쏟아서 옥석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이 때는 눈을 부릅뜨고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을 해 내야 합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역사 속에서 펼쳐가는 것에도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대의 변천과 흐름 속에서 언약의 내용들이 명료하게 더 깊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희미하여서 교훈적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그 영적 의미가 다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해석보다 더 깊은 해석들이 쏟아지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적 해석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기를 바다에 그물을 치고서 고기를 잡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에는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선별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물이 올라오기 전에는 그 속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서 살았습니다.

어부는 바다에 쳐진 그물 속에 비록 나쁜 고기가 있다고 하여서 굳이 선별해 내지 않습니다.

그냥 추수 때까지 둡니다.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셔서 씨를 뿌리셨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본격적으로 농사가 지어집니다.

농사가 지어질 때는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갑니다.

 

이 때는 하나님의 말씀도 큰 틀에서만 이해를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성경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예수 천당만 외쳐도 구원 받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과 2장의 순서가 조금 다르더라도 크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몰라도 복음 전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추수 때가 가까운 때입니다.

추수 때는 완전하게 다 드러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응해져 가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두루 뭉실 넘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서 계시의 폭도 넓혀주시고 깊어지게 해 주시므로 종말에는 모든 말씀들이 그 의미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사람의 창조 시점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1장과 2장을 연속적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연속으로 보게 되면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창세기 저자의 다수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창세기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저자가 다르다고 해 왔습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고,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은 저자가 다르니까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왔습니다.

 

창세기 1장은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엘로히스트’에 의하여 쓰여진 E 문서 계열이라고 하고,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야휘스트’에 의해 쓰여진 J 문서 계열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성경 무오설을 지키기 위하여 내어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상하다고 해서 틀린 것을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설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가설을 묵인 하에 정설처럼 받아 들였지만 진짜 정설이 나타나면 지금까지의 가설은 버려야 합니다.

정설이 왔음에도 가설을 정설이라 믿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건 고집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 무오설도 믿습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이 다른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 할 수가 있을까요?

 

과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예수그리스도가 구속사로 보면 모순이 아니라 정설임으로 풀려집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그러자면 먼저 성경의 기록 목적부터 알아야 합니다.

기록 목적을 알아야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람의 창조가 왜 다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성경을 정의하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라 함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 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실 일들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시는 구속사를 말해주고 있음이 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중심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의 기록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 이야기이든지,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이야기이든지,

여자가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는 이야기도,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죽 옷을 입혀 주는 이야기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이도,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요셉이 기근으로 형제들을 살리는 이야기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나서 출애굽 하는 이야기도,

광야를 거처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하는 이야기도,

또한 가나안에서 타락하는 사사시대의 이야기도,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분열되는 이야기도,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해방되는 이야기도,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이야기도,

구약 이스라엘의 성전이 멸망당하는 이야기도,

또한 어떤 인물이 일으킨 사건도 모두가 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류 전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어 가듯이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구체화 되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역사는 점진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도 점진적으로 전개가 되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점점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삼 시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이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고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도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다른 시간이지만 그 본질을 같은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지평에 서 있습니다.

 

시간 바깥의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내려다보면 역사 속의 시간은 한 경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는 6000년입니다.

 

이것이 창조 6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일곱째 날이 됩니다.

그럼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직전인 지금은 여섯째 날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재림 하시면 일곱째 날이 됩니다.

그럼 일곱째 날도 1000년이 되겠지요.

일곱째 날 1000년이 천년왕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 7일이 역사 속에서 7000년이라는 시간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머리에 그리시고 말씀을 따라 오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왜 다른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아! 이래서 다른 거구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구원은 역사 속에서 마치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처럼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일생을 보면 어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늙어서 노인이 되어 갑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자기 인생을 나누어서 보면 삼 시제로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의 시절은 지난 과거가 되고,

어른의 시절은 지금 현재가 되고,

노인의 시절은 장차 미래가 됩니다.

 

하나의 인생이 세 모습으로 구분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의 모습이 있고,

어른의 때의 모습이 있고 ,

노인의 때의 모습이 있습니다.

 

시작은 어린 아이부터 합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과 노인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깊이를 알아가고 누리는 것에는 각각의 시절마다 다릅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 만큼만 알고,

어른은 어른 만큼만 알고,

노인이 되어서야 자기 인생을 해석할 수가 있어집니다.

인생 자체는 하나로 연결이 되어서 진행이 되어온 것이지만 그 맛은 다 다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이 그러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같은 지평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별개의 사건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다르면서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이 어떻게 다른 지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창세기 1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을 봅시다.

 

창 1:24-2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첫째 날부터 시작이 된 창조가 여섯째 날이 이르러서 완성이 됩니다.

산천초목도 만들고 짐승도 만들고 물고기와 새도 만들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만드신 세계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집을 다 지어 놓고 사람에게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든 곳에서 편히 쉬면됩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은 모든 만물의 창조가 다 마친 후에 완벽한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2). 창세기 2장의 인간의 창조 시점을 봅시다.

 

창 2:4-8절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8-23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장의 사람의 창조 시점은 다릅니다.

흙으로 아담을 먼저 창조를 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짐승을 만드십니다.

짐승을 만든 후에 여자를 만드십니다.

 

사람 - 짐승 - 사람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만들어졌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아담이 먼저 창조가 되고 난 후에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짐승을 만들고 그 다음에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오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소요가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많이 다릅니다.

그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사람이 창조되는 시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의 창조 시점은 모든 것이 창조가 된 이후입니다.

사람이 창조가 될 때는 이미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채소와 씨 맺는 초목 등이 모두가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맨 마지막에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 완성이 된 집에 들어가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의 사람의 창조 시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황량한 들판에 아담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초목과 짐승들이 만들어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을 모두 만들어 놓고 사람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여서 그것들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을 먼저 창조하고 난 후에 그가 살아가는 환경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가십니다.

 

창세기 1장은 완성된 상태이고,

창세기 2장은 미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과 2장을 연결해서 순서적으로 연속적으로 보면 모순이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완성이 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반하여 창세기 2장에서는 미완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본문 스스로가 1장과 2장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1장과 2장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을까요?

창세기 1장은 완성으로 나타나고 창세기 2장은 미완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1장은 전체의 결론을 말하고 있고 2장은 부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는 서론 본론 결론 전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

창세기 2장부터는 1장의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내용들을 서론으로 시작하여서 본론을 지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잠시 뒤에 더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로, 다른 점은 인간을 창조한 재료(material)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에다가 하나님의 생기를 집어넣어서 생령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재료이고,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남자는 흙이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 말씀으로 난 자를 영이라 하고 흙으로 난 자를 육이라고 합니다.

영은 하늘에 속하였고 육은 땅에 속하였습니다.

그럼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영적 존재이지만,

창세기 2장의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땅에 속한 육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하늘로서 난 자이고,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에서 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의 의미도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재료가 흙(아다마)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 명사로서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물론 창세기 1장의 사람도 아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람으로서의 아담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부르는 사람의 구체적인 이름은 남자(쟈칼)와 여자(네케바)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자라는 사람과 여자라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아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물건을 만들고 이것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자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초에 부르는 것이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아담)은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1장과 2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진 것이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남자와 여자가 동시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아담이 흙으로 먼저 만들어지고 난 후에 짐승을 만들고 그 후에 하와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여자는 아담 속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순간적으로 만들어 졌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첫 사람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시간의 순차를 두고서 만들어졌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난 후에 여자를 만드신 것은 아담의 죽음으로 여자가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과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에는 시차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몸에 어떤 변화를 거치고 난 후에 여자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을 연속적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순을 없애려고 만든 논리가 창세기 1장은 개략적인 것을 말하고 있고, 창세기 2장은 1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유념하여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성경이 일관성 있게 증거 하는 그 중심 사상에 맞도록 해석하여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고 하여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게 하려고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식의 해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모순으로 보이면 모순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서 왜 저렇게 할까 의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키워가다가 보면 젊었을 때 어른들의 행동이 모순덩어리로 이해가 되던 것들이 자연히 이해가 되고 어른들의 삶이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가는 것도 그러합니다.

지금은 모순처럼 보이던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이해하다가 보면 그 모순이 순리였음으로 풀려 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성령이시니까 성령께서 왜 모순적인 모습으로 기록을 해 놓았는지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책망을 한다는 것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존에 알고 있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것을 틀렸다고 책망하시면서 새로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듯이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도 왜 다른지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령 지금까지는 모순을 피하려고 억지로 해석하였다 할지라도 정확한 해석이 나오면 지금까지의 해석을 철회하는 것도 지혜로움이고 겸손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다 읽고 나시면 1장과 2장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넷째로, 1장과 2장의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내용이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봅니다.

먼저 에덴동산의 존재 여부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나타난 에덴동산은 인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1장에서는 에덴동산이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 나타난 선악과와 생명과와,

아담 속에서 나온 하와와 그리고 여자가 뱀의 미혹에 넘어간 이야기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간에게 흠 없는 제물을 죽여서 가죽 옷을 입혀주는 이야기 속에는 창세전 언약이 씨눈처럼 담겨져 있습니다.

 

왜 여자가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타락하게 되었는지,

또한 타락한 자들을 에덴동산에서 왜 추방을 하는지,

하나님은 왜 타락한 자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게 하셨는지,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아도 되는데 왜 먹고서 여자와 한 운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 모든 것 속에는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창세전 언약의 축소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는 에덴동산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뱀에게 미혹당하여 타락하고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실낙원의 이야기는 없고 2장에만 나타나고 있을까요?

 

창세기 2장의 아담(사람)은 에덴동산을 지켜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창세기 1장의 사람(아담)은 하나님이 다 만들어 놓은 곳에서 평안히 누리면 됩니다.

 

흔히 문서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창세기 1장에서는 에덴동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 못한 것을 창세기 2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는 너무도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에 창세기 1장과 2장은 연속적인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 선악과와 생명과를 창세기 1장에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냥 흘러 보낼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다섯째로, 창세기 1장의 인간에게 주는 명령과 2장의 인간에게 주는 명령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인간에게는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서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것은 잘 누리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아담에게 내리신 명령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만약에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뱀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뱀이 없는 곳이지만,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살아가는 에덴의 동산에는 뱀이 있는 곳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뱀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사단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을 합니다.

천국에는 사단의 활동이 없습니다.

사단은 천국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창세기 1장에서 뱀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단의 미혹에서 벗어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상징하고, 창세기 2장에서 뱀의 미혹에 시달리는 사람은 역사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을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으로서 창조의 주체로 등장하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서 창조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을 “엘로히스트” 문헌이라 하고, 창세기 2장은 “야휘스트” 문헌이라고 하면서 1장과 2장은 저자가 다를 뿐이지 같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창세기 1장의 하나님과 2장의 하나님이 다르니까 1장과 2장의 저자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이론이 창세기 1장은 “엘로히스트”에 의하여 쓰여진 소위 “E문서” 계열이고,

창세기 2장은 “야휘스트”에 의해 쓰여진 “J문서” 계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내용이 다를 수 있다고 하면서 모순을 피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창세기 1장의 하나님과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의 성호가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 하실 때는 모두가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은 실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성령님께서 창세기 1장의 하나님과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의 성호를 다르게 기록하셨다는 것은 그럴 만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시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로 나타납니다.

 

주석가들은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고, 여호와는 구속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잘못 된 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입니다.

 

창조주는 창조 하시는 분이고,

구속주는 잘못 된 것을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구속주를 다른 말로 구원하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과 2장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완전한 것인데 반하여 창세기 2장은 불완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엘로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마치시고 안식을 하시는 분인데,

창세기 2장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가지고 에덴동산에서 뭔가를 회복해야 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잠시 에덴동산의 정황을 살펴보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 하시고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선악과 속에는 사망이 담겨져 있고, 생명과 속에는 영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되고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고 생명과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때는 아직 여자가 창조되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빈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 속에 무엇을 담는지에 따라서 아담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선악과를 담으면 죽은 자로 살아가게 하고,

생명과를 담으면 영생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로보건데 아담은 아직까지 미완성의 사람인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고서 영생하는 사람으로 한번은 거듭나야 하는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아담을 영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는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미완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완성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는 미완성 된 자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신 엘로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은 아담에게 뭔가 회복을 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사상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창세기 1장에서 일하시던 엘로힘 하나님은 창세기 2장 이후부터는 슬쩍 자리를 피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도록 하셨는지를 잘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님입니다.

언약은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언약을 이루시려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합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자기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셔야지만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이후부터 일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들이 죄값을 치루어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하신 저자이신 성령님께 어찌하여서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다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성경의 모순이 풀려지게 됩니다.

 

이제는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에서 유전적(遺傳的)으로나 혹은 전통적(傳統的)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보충 설명하고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우리는 유전적으로 창세기 1장에서 복수의 하나님들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인간 창조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고, 창세기 2장의 기록은 1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모순이 아니라고 배워 왔습니다.

 

또한 사람의 창조에 있어서도 창세기 2장에서 남자를 먼저 만들고 나중에 여자를 만든 것도 창세기 1장의 보완 설명이지 모순은 아니라고 배워 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도 창세기 1장의 명령 속에 2장의 명령이 추가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에덴동산이 나오지 않는 점도 창세기 2장과 모순이라기보다는 1장에서는 땅이라는 말 가운데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을 2장에서 에덴동산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짐승과 사람이 만들어진 창조 시점을 둘러싼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하여도 1장과 2장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의 창조의 목적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으므로 동의 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 창조는 천지창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사건이지만,

창세기 2장에서의 인간 창조는 천지창조를 시작(始作)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유전으로 배워 온 것은 다 포맷을 하시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과 창세기 2장의 사람의 창조 사건은 서로를 보충하는 설명이 아니라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사람의 창조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사람과 2장에서 만들어진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를 축약(縮約)하고 있으며 일종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성경을 직선적(直線的)이고 단선적(單線的)인 사고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평적인 구조에서 쭉 연결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글이든지 서론(序論)이나 총론(總論)에서 언급된 내용이 반드시 먼저 일어난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즉 앞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나중에 나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책으로 비유를 듭니다.

제가 아가서와 천년왕국이라는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두 권의 책마다 첫 장에는 “이 책의 내용은 대충 이러한 것입니다” 라는 머리말을 씁니다.

그리고는 “이 책의 구성은 이런 내용으로 전개가 되어집니다” 라고 하면서 각각의 내용이 담겨진 곳을 각각의 페이지로 정한 목차(目次)로서 설명을 해 줍니다.

 

1페이지에서 20페이지까지는 무슨 내용이고,

21페이지부터 50페이지까지는 무슨 내용이고,

5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는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라는 식으로 안내를 해 줍니다.

 

목차 속에는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의 내용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나중에 나타날 이야기이지만 목차 속에는 이미 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중에 나타나는 이야기가 목차 속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책의 끝에 펼쳐지는 것이지만 목차라는 1페이지 속에는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그러합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머리말과 같고,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목차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속에 인류 역사 속에서 펼쳐질 창세전 언약을 미리 다 말씀을 해 두신 것입니다.

나는 인류 역사를 이렇게 경영을 해 갈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창세기 1장은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전체 분량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회차에 따라서 전개가 되어집니다.

 

시나리오 속에는 이미 등장할 인물에서부터 그 인물이 어떤 일을 하고 히스토리가 어떻게 전개가 되는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감독은 그 시나리오의 회차에 따라서 배우를 캐스팅하고 시대적인 환경의 셋트를 만들어서 드라마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회차가 거듭 할수록 드라마의 내용은 서론에서 본론으로 본론에서 결론으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이 그러합니다.

천지를 창조 하시고 천지 속에서 일을 경영해 가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을 통해서 나는 앞으로 이 세상을 이렇게 운행해 가실 것이라고 말씀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시는 엘로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역사 속에서 이루시려면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오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총괄 하시는 창조주이신 엘로힘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시고자 하는 창세전 언약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부터는 역사 속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일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계획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7일 창조의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7일은 역사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럼 7일 속의 일들이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난 과거적인 것도 있고,

현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도 있고,

장차 이루어질 것도 있습니다.

 

비록 창세기 1장에서는 7일 창조로 다 보여 주셨지만 7일 창조가 역사 전체에서 사건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므로 이미 일어난 사건도 있고, 지금 이루어져 가는 사건도 있고, 장차 이루어질 사건도 있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서 살펴보십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 2:1-2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러나 천지창조가 다 이루어지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오신 예수님은 창세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게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안식하시지 않고 지금도 일을 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요 5:17절 “예수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는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는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그럼 창조의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실 때의 일은 천지를 창조하는 일이지만,

요한복음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의 일은 인간을 구속(救贖)하시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지시하시고 아들은 땅에서 아버지의 지시를 받들어서 수행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는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합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는 일을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이끌고 온 자들을 위하여 대속하는 일을 하시고,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일을 성도들 안에서 적용하는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 할 때 창세기 1장에서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그 말씀이 응해지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가 되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창조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여섯째 날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두 부류의 인간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은 땅의 짐승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일하신다는 말씀이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창세기 1장의 내용대로 창조가 완성이 된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아버지는 지금도 일을 하시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아직까지 일곱째 날 안식일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엿새 속에 속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안식 하실 수 있도록 여섯째 날로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고 다 찾아서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자기 백성들을 찾는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다 찾음이 되면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일곱째 날 안식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아직까지 안식 할 때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람의 창조는 지금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여섯째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시까지는 여섯째 날인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창세기 2장의 흙으로 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기 1장의 사람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난 자”와 “흙에서 난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고전 15:44-49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사도 바울은 아담(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있다고 합니다.

 

첫 아담은 창세기 2장의 아담을 말하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첫 아담은 흙에서 낫고,

마지막 아담은 하늘로서 낫다고 합니다.

 

흙에 속한 자는 흙의 형상을 입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흙에서 난 첫 아담은 육이라고 하고,

성령으로 오신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영이라고 합니다.

 

첫 아담은 산 영이라고 하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첫 아담은 죽이는 조상이었지만,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살리는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산 영은 육에 속한 자이고,

살려주는 영은 신령한 자입니다.

 

산 영을 육 있는 자라고 하는데 이는 “푸쉬키코스” 로서 혼적인 사람을 말하고,

살려주는 영은 신령한 자라고 하는데 이는 “프뉴마티코스” 로서 영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도 두 사람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8:22절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요 3:6-7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위로부터)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영으로 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아래서 난 자가 있고,

위에서 난 자가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은 역사 속에 항상 있어 왔습니다.

 

구약에서는 예표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사울 왕과 다윗 왕,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

 

첫 사람은 모두가 타락하고 나중 사람이 회복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사람을 우리에게 적용을 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이고,

우리 둘째 사람은 하늘로서 나서 영에 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아담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아담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여섯째 날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7일은 역사적으로는 7000년 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성도들의 구원 속에서도 평생을 두고서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고 하니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예정을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아들의 형상을 입혀 주신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예수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십니다.

그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흙에서 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야곱에게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어미 태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로서 출생을 하였습니다.

이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는 경험을 합니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죄인들 속에 있는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흙에서 난 자들은 모두가 우상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안에 탐욕을 이루고자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이게 야곱입니다.

 

야곱을 그대로 두면 계속하여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이런 자를 천국에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만들어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에서 난 야곱은 죽여 버리고 하늘로서 난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야곱이고 이스라엘입니다.

 

구원이 뭐냐?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이 역사 속에서 엿새가 차기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의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위로부터 난다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짐승이 아니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야곱으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탐욕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록 언약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우리 안에는 세상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흙에서 난 사람(야곱)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성령으로 새로운 사람(이스라엘)으로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이 바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야곱과 같은 코스를 겪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던 바울은 육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흙에서 난 사울이 죽고 하늘로서 난 바울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 경험을 하였습니다.

흙에서 난 사울은 죽고 하늘로서 난 바울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창세기 2장의 흙에서 난 사울은 죽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난 바울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하늘에서 난 사람과 땅에서 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흙에서 나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늘의 기운으로 살다가 하늘로 가는 사람이 있고,

흙에서 나서 흙의 기운으로 살다가 땅 아래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 2장의 흙에 속한 인간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흙에 속한 자를 죽이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려 내는 일을 바로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형상을 입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을 하시면 일곱째 날 안식의 나라인 천년 왕국에 들어가서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 할 때 창세전에 언약 하셨던 그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이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함에도 선악과를 먹고 죽음의 길로 걸어간 것입니다.

아담은 영생 하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영생을 주어야지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가는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어 하늘로 데리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아담에게 소망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메시야가 와서 흙에 속한 자신을 하늘에 속한 자로 거듭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흙에 속한 아담이 어떻게 하늘에 속한 아담으로 살아나는지 알아봅시다.

 

요한복음 5장을 봅니다.

 

요 5:25-29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탄생을 하시자 천사들이 들에 있는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 내용이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실제적으로 나타난 것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찾아가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여 흙으로 난 아담을 하늘로 난 아담으로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흙으로 난 아담을 찾아가서 하늘에 아담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안식을 하실 수 있도록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창조를 하시면 하나님께서 안식하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중심 주제입니다.

어떻게 흙에서 난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만이 서 있어야 합니다.

흙에서 난 아담을 하늘에 아담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흙에서 난 아담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아담으로 살아난 자에게는 예수그리스도는 삶에 의미이고 전부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모든 것을 얻은 자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놓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됩니다.

 

성경은 두 부류의 인생 유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담은 흙에서 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형상을 입고 하늘로 가는 아담이 있고,

어떤 아담은 흙에서 나서 흙에 매여 살다가 영원히 흙에 가두어지는 아담도 있습니다.

 

어떤 아담은 가인처럼 영원히 땅에서 유리방황하고,

또 어떤 아담은 아벨처럼 육신은 죽었으나 영원한 하늘의 사람이 되는 영혼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증거 하는 아담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살아간 자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 11:8-1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는 외국인이고 나그네이고 행인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늘의 아담들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더 이상 흙의 기운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하늘이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가치로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되 세상 사람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거듭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고 행인이고 외국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소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나그네 생활도 끝이 납니다.

그럼 일곱째 날 안식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날이 곧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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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번제와 예수그리스도 (레 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