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주의를 경계하라 (창 10:1-14)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2762019-11-16 오전 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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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 언약 (에베소서 1장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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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영웅주의를 경계하라 (창 10:1-14)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새롭게 열린 세상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름하여 은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세 자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그 말씀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0장부터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인데 홍수 이후인 10장에 들어 와서는 노아의 후손들에게 새 언약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후손들에게 하신 언약은 우리가 알다시피 정결한 짐승이 피 흘림으로 인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나는 언약입니다.

이 노아 언약의 실상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10장 이후로는 장차 주어지는 새 언약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에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너희가 어려서부터 악한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을 보세요.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잘 보세요.

하나님이 정결함 짐승의 제사를 받으시지요.

그리곤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다짐을 하는 겁니다.

어떤 다짐입니까?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주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당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말인고 하니 난 죄인하고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인간하곤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내가 너희들과 상대해서 무얼 하겠느냐 에요.

이건 인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하고 상대하겠다는 겁니까?

정결한 제물이이에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흠 없는 분하고만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흠 없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홍수 이후에 태어난 자들이라고 해서 홍수 이전의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대하는 것이 달라졌어요.

 

홍수 이전과 홍수 이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홍수 이전은 법으로 대하였고, 홍수 이후는 은혜로 대하세요.

홍수 이전에는 우리를 직접 상대 했지만, 홍수 이후에는 정결한 제물하고만 상대하는 겁니다.

 

홍수 이전에는 법대로 대하였어요.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으니 법대로 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너희들이 어려서부터 악한 자인데 내가 너희들을 상대해서 뭐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우리를 상대하는 대신 정결한 재물을 상대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세기 10장 이후에는 새로운 죄관이 생겨났어요.

정결한 재물의 희생으로서 살고 있다는 은혜를 모르면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발가벗었을 때 그 수치를 드러낸 함에게는 저주를 해버리고 수치를 가려준 셈에게는 축복을 한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함은 저주를 받았고 은혜를 아는 셈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홍수 후에 인류는 은혜를 아는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셈과 함의 계열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복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저주의 후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싸우게 되어요.

둘로 나누어지다가 보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10장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들이 나눠지면서 각각의 족속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갈라져서 나라를 만듭니다.

쉬운 말로 하나 하나의 부락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집성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집성촌에 가면 집안들끼리 모여 살잖아요.

과거엔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사님이 두령이면 집사님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만들어 집니다.

이 부락이 곧 국가입니다.

그런 부락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락들이 나눠지다 보니 결국 자기 족속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힘이 동일할 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힘의 균형이 깨어질 때 일어납니다.

그런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결국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인류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아담 이후에 범죄한 인간들은 각각 자기가 왕 노릇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 속에는 모두 영웅본색이 들어 있습니다.

 

모두 왕 노릇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남편들은 왕 노릇하고 싶지요?

이런 죄성들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요.

 

이런 인간들이 모여 살다 보니 자연적으로 힘 있는 자는 더 힘을 갖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꼭 가지고 싶은데 안 된다 하면 빼앗으려 하겠지요?

내가 힘이 없으면? 빼앗기게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십계명을 잘 분석해보면 첫 번째 돌판은 ‘대신 관계’ 이고 두 번째는 ‘대인 관계’입니다.

그 대인관계의 조항을 자세히 보면 모두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무력으로 강탈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살인, 강도, 간음 이런 모든 것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런 힘의 논리로 다스려가는 세상이다 보면 자연적으로 영웅이 생기게 됩니다.

영웅은 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살펴 볼 얘기가 ‘니므롯’ 이라는 영웅이야기 입니다.

8절을 보면

 

8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다고 합니다.

‘구스’ 라는 말은 ‘검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말은 ‘파괴자’ ‘대적자’ 라는 말입니다.

 

풀어 보면 ‘어둠에서 파괴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9장에 보면 무저갱을 여니까 황충이 올라오지요?

이 황충을 아볼루온이라는 하는데 이 놈이 파괴자에요.

 

이게 구스에서 니므롯이 나왔다는 말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 아래에서 파괴자, 대적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대적자의 조상이 함입니다.

 

함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받은 후손 속에서는 영웅이 나오는데

그 영웅은 대적자이고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9절을 보세요.

 

9절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누구 앞에 사냥꾼이라고 합니까?

‘여호와 앞에’ 라고 하지요.

이는 힘을 근거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힘을 결집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그 힘이 결집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벨탑으로 나타났어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에베소서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도 영웅본색이 있겠지요?

 

우리도 눈만 뜨면 본능적으로 힘을 축적하려고 합니다.

그 힘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인간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서 찾지 마세요.

내가 니므롯입니다.

내가 힘만 있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우리 안에 이 죄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지 않고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힘을 빼앗기는 게 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안 빼앗기려고 하고 더 많이 축적하려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언제 하나님과 가깝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입니다.

망하고 어렵고 집에 큰 일이 생겨야 하나님 앞에 울고 불고 매달리잖아요.

힘들 때나 하나님을 찾지 등 따시고 배부르면 여기 이렇게 나오나요?

안 나옵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을 허무는 일로 자꾸 개입을 하시고 간섭을 하세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차압하는 방식으로 간섭하십니다.

 

엊그제 블로그에 요한복음의 마지막 글을 올렸는데 제목이 ‘예수와 함께 띠 띄고 가는 길’입니다.

우리더러 홀로 가라고 하면 갈까요?

안갈까요?

 

이 쪽은 영생의 길이고, 저기는 멸망의 길이니까

멸망의 길로 가지 말고 영생의 길로 가라고 하면 갑니까?

안갑니까?

안가요.

우리는 그렇게 갈 사람이 없습니다.

넓은 길을 가지 좁을 길을 가지 않아요.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뭐라 그러세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해서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넒고 좋아서 다들 그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넒은 길로 간다니까요.

차 타고 가면 비포장도로보다 잘 닦인 포장도로 가고 싶잖아요.

요즘은 낭만에 대하여 라고 하면서 일부러 비포장도로를 즐긴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건 낭만이고 실제는 안 그래요.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챙겨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달달볶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달달 볶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저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십니다.

그래 맞다, 내가 너한테 감정이 많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감정이 우리에게 다가 와서 우리를 자꾸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성경을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치고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게 성경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늘 달달 볶였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잘 살았다니까요.

이방인들은 왜 잘 살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힘을 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표를 줘서 살려주지요?

그러면서 가인의 후손은 하는 일 마다 승승장구 합니다.

성을 쌓고 철기 문명을 발달시키고 합니다.

 

반대로 아벨 대신 준 셋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까?

모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었더라, 죽었더라 입니다.

 

그건 결국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아담이 살아갈 이 세상을 저주해 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는 곳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저주를 머금고 있는 이 땅의 것을 안주는 것입니다.

땅에서 자꾸만 뽑아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뽑아지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우리를 뽑아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강제적인 것입니다.

우리보고 나오라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질 때 어떻게 건지는지 아세요?

 

전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아서 수영을 잘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 많이 건져 봤어요.

특히 여자분들 건질 때는 어디를 잡는지 아세요?

머리카락을 확하고 휘어잡고 끌고 나와야 꼼짝을 못합니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고 나오라 하면 못나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순순히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성경은 말씀을 좇아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은 말씀이 아브라함을 확 휘어잡고 끌고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곱게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땅에서의 삶이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늘 편안함을 달라고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땅에 살려고 합니다.

 

(그림 설명)

우리의 원래 고향은 위에 있는 하늘 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지요?

어디로 돌아갑니까?

 

위에 있는 곳이 고향입니다.

원래 거기 있다가 아래 동네인 역사라는 곳으로 온 것입니다.

역사 속에 있는 것을 ‘육’이라고 합니다.

육이라는 것은 땅에서 낳기 때문에 땅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구원을 하시는데 그것이 빼내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는 것에요.

부르시고 빼내시는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 땅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까 내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빼내줘서 구원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그 은혜와 그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철들어 가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늘 간섭해 오셨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꾸 세상에 정착하려는데 성경은 이 세상 자체를 짐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 세상의 본질을 알려주셨습니다.

 

다니엘서 2장하고 7장에 보면 장치 일어날 나라들을 보여 줍니다.

2장에서는 다니엘에게 큰 금 신상으로 보여주시는데 머리는 정금이고, 어깨는 은이고, 가슴은 놋이고, 다리는 철이고, 발은 진흙하고 철이 섞여 있습니다.

 

한 번 보세요.

머리는 정금인데 맨 밑의 발은 철하고 흙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은 가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7장에 가면 이것을 짐승으로 비유를 하는데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곰 같고, 그 다음엔 표범이 나타나고,

그런데 맨 마지막 짐승은 형상이 없이 그냥 뿔만 열 개 달렸습니다.

지금까지의 짐승보다 더 흉악해서 뭐든지 다 잡아 먹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세상은 가면 갈수록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금 신상으로 비유했을 때 세상은 가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짐승으로 비유할 때는 가면 갈수록 잔인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는 인간들 스스로가 짐승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짐승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나라의 법칙이 뭡니까?

약육강식입니다.

영웅이 누구입니까?

힘을 가지고 없는 자를 강탈하는 것이 영웅입니다.

 

여러분들 격투기 같은 거 보세요.

거기서 우승하는 자를 Hero라고 하지요?

격투기에서 우승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맞아야 합니까?

더 많이 때려야 합니까?

당연히 더 많이 때려야 하지요.

 

오늘날 스포츠를 뭐라고 합니까?

전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들을 전쟁 용어로 씁니다.

사는게 전쟁이에요.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내가 저 아이를 이기지 않으면 내가 지게 됩니다.

그래서 학교 급우들 사이에서 옛날 같으면 정답도 알려주고 그럴 텐데

요즘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내가 좋은 대학 들어가려면 하나를 떨어뜨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입시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전쟁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짐승의 나라이고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렇게 짐승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자를 ‘영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영웅’이라고 하는데 이 ‘영걸’은 ‘폭력자’라는 뜻입니다.

영걸를 ‘기뽀르’ 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진 ‘폭력자’라는 뜻입니다.

 

폭력이 뭡니까?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조폭문화 입니다.

돈이 힘이에요.

여러분들도 수중에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돈을 들고 백화점엘 가 보세요.

모든 사람이 나를 사장님, 사모님으로 부릅니다.

그 때는 내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알기 때문에 자식이 태어나면 돈 많이 벌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재벌 회장들일수록 자식들에게 돈에 대해서 철저히 가르친다고 합니다.

결국 돈 앞에 모두 무릎 꿇게 되어 있으니까 돈이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수중에 돈이 있으면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하나 사도 왕 노릇하며 떳떳한 것입니다.

반대로 돈 없으면 그냥 수그러집니다.

이게 세상 원리고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근간은 조폭 문화고 조폭문화를 올라가면 니므롯 사상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래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그 저주는 다른 것 아니고 스스로 왕 노릇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려면 남을 무너뜨려야 해요.

오죽했으면 권력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눠 갖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니므롯이 살아가는 땅이 어떤 땅입니까?

 

10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게 참 재밌는 게 다른 말로 바벨 땅이라고 하는데 바벨론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전체 땅을 흔히 초승달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굉장히 비옥한 땅입니다.

롯이 아브라함하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집안의 종들도 많아지고 부자가 되니까 같이 살지 못하고 땅을 나누잖아요.

그 때 아브라함이 롯한테 먼저 땅을 보라고 합니다.

 

롯이 보니까 요단 들판이 에덴동산 같다고 하지요?

롯이 찾아가서 차지한 그 땅이 나중에 소돔 고모라로 유황불의 심판을 받는 땅입니다.

그러한 땅을 니므롯 계열이 전부 차지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저주받은 함의 후손들이 전부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땅을 차지하니까 자연히 땅의 부자가 됩니다.

땅의 것을 가지고 힘 있는 영웅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땅의 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힘 있는 자들이 전부 좋은 땅 차지한다면 힘없는 자들을 어떤 땅을 갖게 될까요?

나쁜 땅이겠지요.

사막 지대 같은 곳으로 도망가 살겠지요.

그런 곳에 살면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복의 후손인 셈의 족속들에게는 좋은 땅을 주지 않는다니까요.

그러니까 셈의 후손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아주 역설이지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열악한 환경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 찾는다니까요.

그 열악한 환경이 때로는 가정사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식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고,

건강이나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는 일체의 삶을 하나의 열악한 환경으로 보시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저주받은 함의 후손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들은 땅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 함의 후손 니므롯으로 나타난 민족이 애굽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함의 후손들입니다.

그 애굽의 바로가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잖아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자기 힘을 근거로 해서 억압을 합니다.

결국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구조가 언약의 후손들은

이 땅의 후손들에게 먹힘 당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예수님께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림 설명)

 

위의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아래인 땅으로 내려왔을 때 먹힘 당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구조 자체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내 인생은 내 뜻대로 안 풀릴까 생각하실 때가 많지요?

그게 모두 다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2014년도 에도 잘 돼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잖아요?

잘되긴 뭐가 잘돼요!

잘되면 하나님 떠나잖아요.

 

여러분 보세요.

니므롯이 사는 이 땅이 시날이라고 하지요?

오늘 본문 10절에 ‘시날’ 하고 ‘바벨’이 나오는데

바벨에서 최초로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엇입니까?

바벨탑 쌓는 사건입니다.

바벨론에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자들의 주력이 함의 족속들인데

여기에 셈 족속도 편입이 됩니다.

 

나중에 바벨탑을 쌓을 때는 함 족속만 쌓는 게 아니라 다 끌어드립니다.

이 말은 마귀의 세력들이 세상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두 같은 얘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아이성을 점령하려 할 때 전투에서 대패를 합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시날 산 외투를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그 시날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은 저주받은 함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힘을 믿고 삽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적용을 한 번 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도 내가 땅의 것을 많이 가지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계서는 땅의 것을 안 주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시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이 말을 하나님이 알아서 먹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내 안에서 믿어지면 그렇게 염려가 안 되는데

이것이 안 믿어지면 내 힘으로 얻고자 하지요.

 

그게 우리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내려주는 만나를 먹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치 못한

이유는 인간들의 본성은 하루 하루 주는 것으로는 못미덥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에 잡힌 게 있어야 믿어집니다.

이게 힘이 된다니까요!

바리 바리 창고에 곡식도 쌓아 놓아야 안심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너희들은 너희들이 축적한 힘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매일 만나를 줍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화를 내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도 저 애굽의 사람들처럼 창고에 쌓아 놓고 살아봅시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놈들아! 너희들이 창고에 쌓아 놓으면 날 안 따르잖아!

그래서 이틀 치를 모아두면 다 섞어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 년 동안 맨 날 징징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이걸 그냥 믿음의 법칙으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진짜 하나님께서 매일 입혀주고 먹여 주신다면

그리고 그것이 믿어진다면 이것만큼 안심이 되는 일이 없잖아요.

어린 녀석이 부모가 다 알아서 먹여 주고 입혀주고 하는구나 하고 아무 염려 없이 살잖아요.

 

사람이 언제 염려가 생기는지 아세요?

철들면서 염려가 생깁니다.

철없이 사는 게 좋은 데 우린 자꾸 철들려고 한단 말이지요.

아이들은 철이 없기 때문에 염려 근심을 안 합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 그 때 부터 인생이 복잡해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우리 엄마 아빠가 유산 좀 줄려나 하고 염려가 생긴다니까요.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집도 몇 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합니다.

그런데 딸이 그런다잖아요.

 

돈 많이 쓰지 마세요.

그 거 내 꺼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게 철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철 드는 것은 결국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제발 철들지 마세요.

신앙의 철이 들면 복잡해집니다.

그냥 머리에 꽃 하나 꽂고 사세요.

 

그런데 그렇게 안 살고 싶지요?

미친 사람처럼 머리에 꽃 달고 살면 모든 사람에게 조롱당하지요.

우린 그게 싫은 겁니다.

 

미친 사람에겐 암이 안 걸린다잖아요.

그것만큼 편한 게 없습니다.

암은 고민을 많이 하니까 걸리는 거에요.

다 시사 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아이가 어려서부터 큰 학원에 보내고 그러잖아요.

제가 예전에 학원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7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조봉기라는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어느 날 버스에 올라타면서 하늘 말이

‘아저씨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그러는 거에요.

 

전 깜짝 놀랐어요.

7살짜리가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어보니까

놀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7살짜리 아이가 학원을 7 군데나 다닌다는 겁니다.

학원 차가 오면 엄마가 가방 바꿔주는 걸 들고 다른 학원을 가고 또 가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든지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아이들이 학원가서 공부 안 해요.

강제적으로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잘 놀게 하세요.

 

아이를 잘 놀게 하려면 부모가 믿음이 있어야 해요.

엄마가 믿음이 없으면 내 아이가 남들보다 처질까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 니므롯 같은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강제로 개입을 하셔서 그 니므롯 사상을 깨트려 버리시는 겁니다.

그렇게 깨어질 때마다 우리는 아파서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합니다.

그게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짐승의 나라이고

이 짐승의 나라는 반드시 힘의 원칙으로 다스려 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힘의 원리로 다스려지는 이 세상을 하나의 허구로 고발을 하십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 세상은 결국 무너질 세상입니다.

묵시는 실상이고 역사는 허상입니다.

이 허상 속에서는 아무리 해도 진짜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얼마나 마귀가 영악스러운가 하면

에덴동산에 보면 강물이 하나 흘러 네 갈래로 흩어지는데

이렇게 네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게 나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마귀는 이것을 또 흉내 냅니다.

인류 발달의 문명이 4대 문명으로 나타납니다.

이 4대 문명이 전부 강을 끼고 나타납니다.

 

중국의 황하문명은 황하를 끼고 나타나고

인도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을 끼고 나타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유브라데스 강을 끼고 나타나고

이집트는 나일강을 끼고 나타납니다.

항상 강을 끼고서 나타납니다.

 

이건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물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강가를 중심으로 해서 문명이 발달하고 나라를 만들어요.

그리고 문명의 나라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항상 강을 끼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 강에 산다 할지라도 그 강물을 그냥 황하나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강이 에덴동산에 흐르는 강인데 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맞어! 우리가 하나님이 흘러 주는 그 강물을 먹고 살고 있구나,

이걸 알면 감사가 됩니다.

 

혹시 산책을 하시면서 여러분 집 주변의 강을 보더라도 그냥 보시지 말고 이 강물은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그 강물이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비록 집 주변의 강물이지만 거기서 은혜를 받는다니까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이런 은혜로 살고 있구나를 알게 됩니다.

 

신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눈을 받았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게 보여지는 겁니다.

모든 만물 속에서...

 

여러분 보세요.

이 만물 자체는 전부 우리로 하여금 윗 세계를 보게 하는 시청각 교재입니다.

함의 후손인 니므롯은 땅의 것을 힘을 삼아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셈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들은 땅의 기업을 받은 자가 아니고

하늘의 기업을 받은 자이니까 하늘의 힘을 삼고 살아야지요.

 

그게 셈의 후손이지요.

함의 후손은 어차피 저주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저주받은 이 세상의 힘을 받아 살겠지만

우리는 이 저주받은 세상의 분깃을 얻은 자가 아니고 하늘의 분깃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하늘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야 해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하늘로 오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예수님을 하늘에서 보내지 않고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영웅호걸을 만들어서 우리를 빼낼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셨어요.

왜요?

땅에서 난 자는 땅에서 빼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는 하늘로서 오는 것입니다.

땅과 상관없이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를 하늘로 빼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의 실제는 결국 짐승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사건 사고가 나고 아픔들이 일어나는구나를 보시면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야~! 여기는 오래 살 곳이 못되는구나 하고

자꾸 저 위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기를 잘 가꾸면 잘 될거야 하지 마세요.

물론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육신이 편하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린 이 땅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윗 세계를 바라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겐 하늘을 바라보는 눈을 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줬는데

그 성령을 일컬어서 ‘일곱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이 떠진다니까요!

그렇게 눈이 떠지니까 비로소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어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있는데 11지파에게는 기업을 주고 1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습니다.

 

1 지파가 누군인가 하면 레위지파입니다.

레위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는 것은 하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1 지파에게 명령하기를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하였어요.

레위지파는 백성들이 낸 십일조를 먹고 삽니다.

 

십일조란? 하나님의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위지파는 하나님 것을 얻어먹고 사는 지파가 됩니다.

이게 꺼꾸러 어떻게 되는가 하면 11지파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침으로서 나머지 아홉 개도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되어요.

 

1개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 9개도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러니 11 지파는 하나님 지파를 상징하는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것으로 삽니다 라는 고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지파에게 너희는 세상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것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레위지파가 신약에 오면 성도로 나타납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모두 레위지파인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땅에 기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고 하늘의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업을 받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겁니다.

이 나그네들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강을 건너온 자’들입니다.

 

‘강을 건너온 자’라는 것은 모든 인류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그 강을 차지한 자들이 누구에요?

저주받은 함의 민족들이죠?

 

히브리인들은요?

그들은 그 강을 건너온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우리는 모두가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고

그 강을 건너온 자들이에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강을 넘어 온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땅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겨자씨 같이 미미할 정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의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이에요.

 

신자는 이 세상에서 보일 듯 안 보일 듯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회에는 영웅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교인들은 영웅을 원합니다.

어떤 특별한 목사를 원합니다.

 

그 목사도 그냥 평범한 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목사를 요구합니다.

그걸 지금 교회에서는 다른 말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카리스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카리스마는 목사가 위에서 왕처럼 군림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카리스마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카리스마는 섬김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교인들마다 자기 속에 전부 영웅본색이 들어 있으니까

내 영웅심을 흡족하게 주는 또 다른 영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웅 목사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목사님은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외국 유학도 다녀와야 하고,

박사 학위도 받고 언변도 좋은 그런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기준이잖아요!

 

성경적으로 볼 때 목사는 하늘의 소리를 전해주는 자에요.

목사는 모세 역할을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늘나라에 대한 비밀을 받아 산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전해주지요?

 

목사가 이거 하는 자에요.

시내산 위 소식을 전해주는 자에요.

그러니까 목사를 이 세상 가치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유명 대학을 나왔느냐 학위를 받았느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목사는 성령의 영감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달아 주시는 그 말씀들을 성도들에게 자꾸 풀어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사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회는 그런 목사를 원하는 게 아니고

우리 목사가 저 쪽 목사와 비교했을 때 뒤지지 않는 목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말은 교회! 교회! 하지만 유명한 목사 그늘에서 안주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목사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 사람도 유명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끼지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내가 추종하는 목사가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어디가면 목사를 자랑하고 큰 교회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니므롯이 큰 영웅인데

이 영웅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이 거하는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성 안에서 자기들을 보호합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들을 지켜주는 성주가 힘 있기를 바라겠지요?

 

그게 지금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 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도 교회가 하나의 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인들은 그 성 안에 들어와서 니므롯 같은 영웅을 원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목사를 원하는 거에요.

그 목사와 함께 있으면 자기가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 목사가 그 사람을 지켜주는 것처럼 착각을 한단 말이에요.

 

아니에요!

여러분을 지켜주는 것은 목사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제가 그러잖아요.

여러분들이 만난 하나님,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서 정낙원 목사가 만난 예수가 백 번 있어도 무슨 소용 없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만난 예수에요.

여러분의 예수가 아니에요.

구원은 여러분이 만난 예수로 주어져요.

그러니 목사 자랑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만나서 믿어지는 게 없으니까 자꾸 주변에 있는 세력들에 흡수가 되어서

그 속에서 안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창세기 10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좋은 교회 나쁜 교회를 뭘로 평가합니까?

세상적 가치로 기준삼아 평가하잖아요.

돈 많고 예배당 크고 사람 수가 많으면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사람 수가 많으면 진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울산의 모 교회도 처음엔 이단이라고 했는데 사람 수가 많고 교회가 커져서 교단에 돈 많이 가져다주니까 이젠 정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교회만 그런가요?

그런데 이 교회도 교회만 크게 지었다가 유지가 안 되니까 다른 대형 교회에 먹혀 버렸습니다.

돈이 돈을 먹는 것입니다

조폭세계지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그런데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위의 세계가 안보이니까 아래 땅의 가치만 가치고서 힘 있는 자로 군림을 하는 것입니다.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숫자 많이 모으면 그 사람은 신령한 목사가 됩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그런데 이런 걸 누가 그렇게 만듭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영웅을 자꾸 생산해 내잖아요.

결국 그 교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믿는 것입니다.

니므롯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웅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인데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영웅처럼 지내셨습니까?

아니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해서 지키고자 원수들을 다 쓸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 세상을 줘 버렸어요.

이 저주받은 곳을 가져 뭐하겠어요?

그래서 이건 너나 가져라 하고 주신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을 가진 것을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데 앞에 뭘 하나 붙여서 말합니다.

뭔가요?

‘적’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이 땅에 영웅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힘에 가치로 사는 자들은 다 그를 그리스도라고 따라요.

이게 미혹이거든요.

 

그러나 우리의 진짜 영웅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힘없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힘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영웅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함의 후손은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셈의 후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라요.

 

결국 자기 안에 어떤 가치이냐로 신앙이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계세요?

스스로 한 번 자문을 해보세요.

 

내가 믿은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땅의 가치인가 하늘의 가치인가?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 오늘 어떤 말씀을 제게 들려주시려 합니까?

하늘의 말입니까?

땅의 말입니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시란 말입니다.

제가 만약 땅의 말을 전하면 여러분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 떠나셔야지요.

 

땅의 것을 원하시면 이왕이면 큰 교회 가세요.

머슴도 큰 집에 살아야 먹을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치가 땅의 가치가 아니고 하늘의 가치일 것 같으면 크다 작다 따지지 말고 복음이 있는 곳에 머무셔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은 하늘의 가치를 보고 살도록 간섭해 가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 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를 바라보라.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게 해서 자꾸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 하나만 비유로 말하고 마칠게요.

 

작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 ‘타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08층 짜리 중 복합 호화아파트를 지어놓고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모두 모여 파티를 하고 있는데 헬리콥터가 충돌해서 불이 났습니다.

그 건물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파티를 할 때는 여기가 철옹성같이 생각하고 즐긴 것입니다.

부자들이 모여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건배를 하고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게 신기루구나.

저게 이 세상의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세요.

화려한 이 세상이 일순간에 맷돌이 바다에 빠지듯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니까 이 땅을 보지 마세요.

 

이건 전부 허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을 보게 한 그 눈을 주신 것에 감사하세요.

 

아무리 세상에 영웅호걸이 나오고 화려한 자들이 나온다 할지라도 다 쓸데없는 것이고

결국에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봐야 할 세상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니까

이 하늘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즐겁게 교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큰 건물 없어도 돼요!

사람 숫자 많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위의 소식이 들려짐에 있습니다.

하늘나라 소식들이 증거가 되고 하늘나라 소식들로 서로 서로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교회를 하늘에 가치로 세워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태그 성경강해 투명한오후
댓글내용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레 6:8-13)
♣'죽임당하기 위하여 남겨진 자들 (계 6: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