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한 라합 (히 11:31)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1962019-11-11 오전 6:24:00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 언약 (에베소서 1장 3-10)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한 라합 (히 11:31)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고 자기 백성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믿음은 어느 시대나 있었어요.

구약에 성도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의 성도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다른 말로 믿음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행함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행함이 아니고 믿음인 겁니다.

믿음은 우리 영역에 속하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 합니다.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도 믿을 재간이 없습니다.

 

믿음은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구약의 성도들을 간섭하신 믿음이 지금도 우리를 간섭하고 계세요.

구약과 신약의 환경은 달라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격은 동일합니다.

 

구약의 믿음이나 신약의 믿음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신약에서도 믿음이 간섭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곧 내가 되는 겁니다.

 

내가 바로 노아이고,

내가 바로 아브라함이고,

내가 바로 모세이고,

내가 바로 기생 라합이기도 합니다.

 

이는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가 동일한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한 성령을 마신 성도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은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가치로 살면 세상이 감당하는데, 세상 가치로 살지 않으면 세상이 감당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으면 자연히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비주류(非主流)에 속하여 외면당하며 산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 것은 모두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의 성도들에게 장차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에 동참케 한 겁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에 선진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맛보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삶으로 표현 되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약에 바울이나 12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이 시대 예수님 십자기 피를 증거하는 성도들에게도 고난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12제자들이나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지금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세상을 나그네로 삽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 같이 살고 있어요.

 

성도는 세상에 기득권이 없는 자들이에요.

기득권이 없으므로 할 말도 없습니다.

정착할 곳이 아니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라합” 은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자세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라합과 같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라합이 자기를 찾아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준 것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배신케 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라합은 하나님 백성입니다.

정탐꾼을 살려 주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편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라합은 몸은 여리고에서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여리고가 멸망 할 때 정탐꾼들을 보내서 라합의 가족을 살리게 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봅시다.

 

수 6:22-25=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23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24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정탐꾼을 살려준 대신 자기 가족을 살려냈다고 합니다.

라합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이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믿음으로 라합이 여리고의 멸망 가운데서 가족을 살렸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믿음이란 참으로 고약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나라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따른다고 생업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직장도 버리고 가정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치 이 시대 신앙을 위해서 가정도 버리게 하는 이단들과 같습니다.

 

이런 신앙을 어찌 유대인들이 용납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출교를 각오하여야 합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곧 그 사회로부터 죽임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항상 그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라합의 예로 보면 믿음은 인간의 사정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라합을 간섭하니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 받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서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입장에선 역적입니다.

역적을 두둔한다는 것은 곧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드러내 놓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적발이 되면 출교를 당했어요.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에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청년을 고쳐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소경이었던 청년의 부모를 불러다가 진짜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주었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한마디로 아니라고 하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봅시다.

 

요 9:20-22=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추궁하자 소년의 부모들이 아이에게 물어 보라고 합니다.

저 아이가 소경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예수가 눈을 떠주게 한 것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준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했다고 하면 예수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했어요.

그러니 누가 예수를 믿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였던 겁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로부터 출교 당한 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유대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입니다.

유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유대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잃고,

직장도 잃고,

가족도 잃고,

정든 고향도 잃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니 누가 대 놓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어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회는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죽는다” 예요.

그러니 소경이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된 아이의 부모는 자기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시대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에 근원의 문제와 맞닥뜨려요.

죽느냐 사느냐 입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겁니다.

 

결국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버리고 자기들이 살아난 겁니다.

반대로 아이는 부모를 버리고 자기는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의 라합과 같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댓가로 이스라엘에게서는 영웅이 되었지만 여리고에서는 역적입니다.

지금도 세상 관점에서 여리고의 역사를 말하면 라합은 여리고의 역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마치 우리나라 역사가 조선 말기에 한일합방을 성사 시킨 이완용이를 매국노라고 낙인찍어 놓은 것과 같아요.

우리나라 역사가 존속하는 한 이완용이는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선 구원을 받았으니 기뻐할 일이지만 세상적인 측면에선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세상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세상 편에 서면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아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예수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했어요.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말입니다.

라합이 여리고를 배반한 것은 곧 여리고에서 죽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세상에서 죽도록 인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은 인정도 사정도 용납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말을 들어 보세요.

정나미가 뚝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부모의 장사를 지내고 따른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이건 세상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상식에 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라 오려면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전토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합니다.

부모 자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런 요구를 따르겠어요?

당연히 예수를 믿고자 하지 않지요.

혈통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어느 누가 혈통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단 말입니까?

 

이는 결국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여도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는 육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는 말은 인간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이 예수를 믿도록 밀어 붙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믿게 해 버립니다.

믿게 해 버리면 안 믿을 도리가 없어요.

반드시 믿게 되어 있어요.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줄 뻔히 알고도 믿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믿음이 간섭해 주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싶어도 못 믿고, 예수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가 없지요.

이상한 논리입니다.

믿고 싶어도 못 믿고,

안 믿고 싶은데도 믿어야 하는 팔자가 믿음에 팔자입니다.

 

믿음이 완전히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막아 버리고 합니다.

인간은 그저 예수를 앞에 두고 눈 빤히 뜨고 구경만 하여야 하는 신세가 구원입니다.

 

믿으라고 하면 예! 하고 믿고,

믿지마! 그러면 예! 하고 못 믿어요.

아주 웃기지요.

이런 이야기가 바로 성경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라합 이야기도 그런 이여기입니다.

지난 시간 여리고 성의 멸망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의 멸망은 계시사적으로 장차 이 세상의 멸망을 예표(豫表)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릴 때 살아남았다는 것은 종말에 구원받았다는 말이지요.

 

여리고가 무너질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바로 오늘 살펴볼 라합입니다.

라합이 여리고 성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살아 날 수가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영접한 결과입니다.

 

지난시간 살펴보았듯이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해서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일곱 제사장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어서 무너뜨렸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린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을 품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전쟁을 해서 무너뜨린 것도 아닌데 왜? 정탐꾼을 보냈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정탐꾼이란? 첩자입니다.

 

정탐꾼이란? 전쟁을 위하여 보내는 자들입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군사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작전을 알기 위해서 은밀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가서 한 일이라곤 라합이라는 기생을 만나고 온 것뿐입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갔다 온 것이 아니고 여리고 사람들에게 들켜서 라합의 기지로 간신히 살아서 돌아 왔습니다.

 

그럼 여기서 결과론적으로 풀어 보면 여리고 성에 정탐꾼이 왜? 갔는지 그 해답이 나옵니다.

정탐꾼이 멸망 할 여리고 성에 간 것은 라합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라합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낸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하는지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살리려면 반드시 누구를 보내요.

그러면 살아날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또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찾아가요.

반면에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알아봐요.

 

그래서 정탐꾼이나 라합이 서로 알아 본 겁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알아보고 영접하였고,

정탐꾼은 라합에게 멸망 속에서 살 길을 알려 준 겁니다.

누기 이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래요.

마치 소개팅을 할 때 양쪽에 약속 장소로 불러내서 만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정탐꾼이 라합을 찾아간 것은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간 것과 같아요.

그리곤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군말 없이 예! 그러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여러분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직장 생활 잘하는 베드로보고 따라오라고 하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한다고 해서 직장을 팽개치고 쫄래 쫄래 따라가는 베드로나 똑 같아요.

 

둘 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이해되지 않는 일이 예수를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을 상식으로 접근하면 안 되어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멸망할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자기를 살려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으로 본 것은 아니에요.

신약식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알아본 것을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믿음이 라합을 어떻게 간섭하셨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당시 상황을 봅시다.

 

여호수아 2장입니다.

 

수 2:1-7=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6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습니다.

여리고 성은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 입구에 있어요.

그러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리곤 요단강을 건넙니다.

수십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온다고 하자 여리고 성의 왕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왕이 전국적으로 공포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이스라엘 사람이 잠입을 할 터이니 그 놈들을 보면 신고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상사태가 선포 된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 라고 해 보아야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마을입니다.

당시는 소 부족국가 형태의 시대이므로 국가 개념이라고 해 보아야 이 시대의 규모 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도시 정도입니다.

옆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알 수 있는 시절입니다.

그러니 동네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그 즉시로 알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라합이 운영하는 주막에 낯선 사람이 왔다는 것을 누가 봤어요.

그리고 여리고 왕에게 고합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라합이 얼른 정탐꾼들을 지붕에 널어놓은 삼대 속에 숨겨 버립니다.

이건 목숨을 걸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신고를 받고 군사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군사들이 이 집에 수상한 놈들이 들었다고 신고를 받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놈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 놈들은 이스라엘의 첩자들이니 당장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이에 라합이 그들은 주막 문 닫을 시간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군사들을 따돌립니다.

조금 전에 강을 건넌다고 갔으니 빨리 좇아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군사들을 보냅니다.

군사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라합은 영업을 끝내고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리곤 정탐꾼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을 합니다.

 

수 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곧 평상시에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막집을 하면서 귀 동냥으로 들은 말이겠지만,,,,

그러나 귀 동냥으로 들었든 스스로 알고자 하여서 들었든지 간에 이방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라합을 간섭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정탐꾼을 여리고 왕에게 신고를 했는데 라합은 숨겨준 것입니다.

 

정탐꾼을 여리고 왕에게 신고한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자 신고를 했지만,

라합은 자기 생명을 여리고의 멸망 속에서 살리고자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정탐꾼을 신고한 사람은 여리고를 떠날 수 없는 여리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위해서 정탐꾼을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언제든지 여리고를 떠날 하나님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영접하고 숨겨준 것입니다.

 

여리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여리고를 위해서 일을 하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지금도 세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라합이 평상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정탐꾼이 오자 즉시 영접한 겁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 한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를 라합과 정탐꾼으로 비유하면 하나님께서 둘을 만나게 해 준 겁니다.

마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처럼 만난 것입니다.

 

여리고를 세상이라고 하면 정탐꾼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럼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 한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같습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라합으로 하여금 예수님(정탐꾼)을 영접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에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금 정탐꾼을 영접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된 성도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된 성도이기 때문에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정탐꾼)을 영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라합과 같이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들을 위하여서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성도를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라합처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고 삽니다.

이건 억지로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예수는 억지로 믿을 수 없어요.

 

교회를 다니는 것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만 믿을 수가 있고, 교회는 자기 의지로 다닐 수 있어요.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다니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거짓 목사들도 그런 식으로 가르쳐요.

 

거짓 목사들은 자기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교회만 있으니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충성하라고 합니다.

교회 충성이 곧 예수님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예수의 종이라고 하면서 대접을 받고 있어요.

참으로 뻔뻔스럽기 그지없어요.

거짓 목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도 거짓 신자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님께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둘 다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인도를 받으면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소경을 길잡이로 세운다는 것은 자기도 소경이란 말입니다.

소경이 아니고서는 소경을 인도자로 세울 수가 없어요.

길잡이 또한 소경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소경인줄 알고 앞장서서 인도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요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은 다른 목자를 따르지 않습니다.

도리어 도망을 합니다.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교회 안에서 난무하는데도 그 소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양은 반드시 예수님의 음성만 듣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양들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들 대신에 매를 맞았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 이런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 함은 아담 안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성도는 아담의 법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법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님의 법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법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성도를 일컬어 의인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의로우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도 착한 사람이 많아요.

그럼에도 죄인이라 하는 것은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죄인입니다.

 

구원과 저주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조상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저주의 조상 안에 있으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주를 받게 되고,

구원의 조상 안에 있으면 자기 형편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구원 안에 넣어준 분을 자랑하고 삽니다.

 

누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하면 예수님 피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가 죄사함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죽음으로부터 이기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는 말은 너 믿지 말고 예수 믿으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나를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과 상대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를 안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나는 죽었다” 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죽은 자 같이 사는 자들입니다.

난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난 죽은 자입니다 로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불교가 돼요.

불교는 무아사상(無我思想)을 가르칩니다.

무아(無我)란? 난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아(自我)란 없어지지가 않아요.

자아는 인간이 없앤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아무리 없습니다! 라고 해도 여전히 난 있어요.

그러니 불교에선 난 없습니다! 라는 자신을 자랑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난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난 여전히 살고 있는 겁니다.

말이 이상하지요.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은 무아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없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없고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입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인간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으니 율법과는 상관이 없지요.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내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비록 살고 있어도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비록 율법을 범하여도 율법은 나를 참소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다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난 지금 예수님께 빚진 자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해고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하신 일만 드러내고 살겠다는 말입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려면 나는 죄인의 자리로 나아가고,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드러나야겠지요.

나는 죄인이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을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알다시피 기생입니다.

기생이란? 가장 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생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에요.

그런데 기생이 거룩한 백성에 편입이 된 겁니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건 마치 강아지가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을 믿음이 벌린 것입니다.

 

이름하여 거듭나는 기적입니다.

성도는 거듭남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늘 기적 가운데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죽음이 넘실대는 홍해 속에서도 살아남고 풀무불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입니다.

 

라합과 정탐꾼 이야기를 더 살펴봅시다.

군사들이 떠나고 난 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기가 정탐꾼을 살려둔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라합은 여리고가 멸망 할 때 살아날 약조를 해 달라고 합니다.

 

수 2:12-21=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찌니라 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반드시 여리고가 멸망 할 때 라합의 가족은 살려주겠다고 자기들 생명을 담보로 약속을 해 줍니다.

그 약속의 증표가 바로 붉은 줄을 창에 매 달아 놓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라합의 집에 이상한 현상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창문에 붉은 줄 하나가 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에 보지 못한 풍경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창가에 매단 붉은 줄의 비밀을 모릅니다.

라합의 집엔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창가에 붉은 줄이 나부낍니다.

 

창문에 붉은 줄이 매 달린 것은 곧 출애굽 때 문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 피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만난 사람의 특징은 붉은 줄을 창문에 매 달고 산다는 것입니다.

 

창문이란? 우리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보낸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줍니다.

예수님이 보낸 정탐꾼은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합니다.

피만 믿으라고 합니다.

정탐꾼을 만난 사람은 붉은 줄을 내 보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낸 정탐꾼을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정탐꾼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정탐꾼으로부터 죽음에서 살아날 비밀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란 다름 아닌 붉은 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입니다.

 

여리고 라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다는 겁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마귀와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리고에 살든 어디에 살든 마음의 창문에 붉은 줄만 매 달고 있으면 반드시 살려 내십니다.

 

라합은 붉은 줄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라합에게 있어 붉은 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생명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의 피가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이 터치하고 간 사람들의 특징은 십자가 피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참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목사의 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증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십자가 피를 말하면 식상해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기 피를 이야기 하면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세상 이야기 하면 환해집니다.

십자가 피 이야기 하면 화답하지 않다가도 땅에 이야기 하면 화답을 해요.

 

목사나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를 낯설어합니다.

도리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 십자기 피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타박합니다.

 

“그 십자가 피” 라고 합니다.

이젠 십자가 피를 넘어 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묻겠습니다.

십자가 피 넘어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피를 넘어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자들의 변(辯)을 들어 보세요.

이들은 말씀을 지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거룩한 삶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착한 삶이 나옵니다.

 

그럼 다시 착한 삶이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신앙적으로는 교회 충성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고,

세상 적으로는 술 먹지 않고, 룸싸롱 가지 않고, 노래방 가지 않고, 사기 치지 말고, 밥 퍼주는 사랑하고,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종교적으로는 교회의 문을 지역사회에다 활짝 열어 놓아 사람들이 교회를 편하게 올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퀴즈한 번 낼게요.

맞춰 보세요.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1번). 기생 노릇 안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살았다.

2번). 여전히 기생 노릇하고 살았다.

 

정답은 2번입니다.

 

여리고가 망할 때 라합은 여전히 그 기생 노릇하던 집에서 구원을 받았어요.

주막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달아 놓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그 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뭐가 달라졌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술 담배 먹던 사람이 예수 믿고 난 후에 끊었습니까?.

예수 믿기 전엔 거짓말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난후엔 거짓말 안 합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신경질을 잘 냈는데,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신경질을 적게 냅니까?

과거 김익두 목사처럼 예수 믿기 전엔 깡패였는데 예수 믿고 난 후 목사가 된 것입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남을 배려하지 않았는데 예수 믿고 난 후로는 남을 배려하고 삽니까?

 

정녕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바라는 십자가를 넘어간 사람들의 삶입니까?

여러분 이런 삶은 세상 종교에서 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선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악한 사람 되라고 하지 않아요.

 

마귀도 착한 사람 되라고 하지 악한 사람 되라고 하지 않아요.

마귀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살인하라고 하지 않아요.

마귀는 바람피우지 말라고 하지 바람피우라고 하지 않아요.

마귀는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지 도적질 하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지옥 불에 들어갈 독사 새끼들이라고 했어요.

왜? 그랬습니까?

 

이는 인간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선한 사람인 줄 압니다.

 

흔히들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지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천국 갈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경을 칠 말인 줄 아세요?

세상 사람들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을 굳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공연히 자기 아들을 죽인 겁니다.

 

인간은 종교나 교육으로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거든요.

지금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산상보훈을 지키고자 합니다.

산상보훈대로 살면 착해지는 줄 알아요.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을 하신 것은 실천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산상보훈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하니 율법의 근본정신은 이런 것이다! 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는 식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재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신상보훈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말하고 있어요.

율법에선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산상보훈에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고 해요.

간음은 실제로 하는 행동이고, 음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본능입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산상보훈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살인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고, 미움은 마음에서 일어납닙니다.

 

간음이나 살인은 보이는 것이지만, 음욕이나 미움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음욕이나 미움은 뿌리와 같아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본능이고 본성을 말해요.

 

여러분 본능은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본능은 자연 발생적인 겁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그런 것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니 본능적으로 미워지고 예쁜 여자를 보면 불끈 힘이 솟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본능은 막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산상보훈을 가지고 인간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는 인간이 산상보훈처럼 사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런 인간을 창조하셨어요.

 

산상보훈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 같은 삶이 나와요.

예수님은 산상보훈처럼 사셨어요.

예수님은 창조에 속한 삶을 사셨어요.

창조에 속한 사람은 이타주의에요.

그러니 산상보훈대로 살면 이타주의가 되어요.

 

그런데 죄가 이를 역으로 바꾸어 버렸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죄가 들어오면서 자기를 위해 살게 되었어요.

죄가 뭐냐?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자존자이고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니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여서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되었어요.

 

여러분 피조물이 하나님 같이 되면 어찌 되는 줄 아세요.

피조물이 하나님 같이 되면 전부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버려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살려두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여 버려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세워지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세워져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을 보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좋은 것을 하잖아요.

음식도 자기 좋은 음식을 먹고, 옷도 자기 좋은 옷을 입고, 색깔도 자기 좋은 색깔을 취하고, 사람도 자기 좋은 사람을 사귀고, 뭐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까이 두고 살잖아요.

 

여러분이 함께 사는 아내나 남편을 보세요.

아내나 남편이 싫은데도 결혼을 했습니까?

아니지요.

다 내가 좋아서 했잖아요.

부모가 반대를 해도 자기가 좋으면 도망가서라도 살잖아요.

 

왜? 그런가요?

그게 바로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죄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살아요.

 

어저께 강호순이가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일품입니다.

다음 생애엔 잡히지 않고 살인을 하겠대요.

 

이 사람은 살인을 재미로 했다고 합니다.

왜? 내 재미를 막느냐 이겁니다.

다음 생애에 태어나면 붙잡히지 않고 재미를 즐기겠대요.

이번엔 잡혔으니 다음엔 잡히지 않게 연구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재미있자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마음 속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사람을 죽여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차 앞에서 비키지 않고 알짱거리면 욕이 튀어나오고 법이 없으면 다 치어 죽이고 싶어요.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피하지 않으면 화가 나요.

경적을 울려도 비키지 않는 인간들을 보면 다 갈아죽이고 싶어요.

 

이게 반대로 내가 보행자라고 하면 뒤에서 빵빵 거리는 운전사 들은 다 죽이고 싶어요.

횡단보도 건너가는데 차가 휙 지나가면 본능적으로 욕을 바가지로 하잖아요.

그 어느 누구도 자기편에서 판단하고 말하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아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이게 본성이고 본능입니다.

 

죄는 자동으로 이기주의로 살게 작동을 해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자동적으로 이기주의로 흘러요.

죄가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착하게 살아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합니까?

인간은 착해질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선 선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니 십자가 너머에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차라리 강아지 보고 사람 행동 하라고 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지금은 유전자 조작으로 강아지에게도 사람의 행동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르렀어요.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인간에게서 죄를 없애진 못해요.

 

인간에게서 죄를 없앤다는 것은 곧 죽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착한 사람이 되라고 성화를 주장합니까?

성화는 없습니다.

최고의 성화는 예수 믿는 겁니다.

난 죄인이고 예수님 피로 의로워 집니다! 라고 사는게 최고의 성화입니다.

 

라합에게서 최고의 성화는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달고 사는 겁니다.

라합이 기생 생활을 청산하였다 할지라도 붉은 줄이 없으면 여리고가 망할 때 같이 망합니다.

하지만 비록 기생 노릇을 하고 있어도 창문에 붉은 줄만 있으면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이지 개과천선한 삶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마음속에 담고 살면 살인자라도 구원을 받지만,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없으면 목사라 할지라도 지옥에 갑니다.

평생 동안 착한 삶을 살면서 교회 다니다가 지옥에 간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반대로 평생 동안 강도짓만 하다가 예수님의 피 믿고 천국에 간 사람이 강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천국에 갔다는 것은 인간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데 강도가 천당에 갔다!

이건 도발입니다.

인간에게 선전포고 하는 겁니다.

 

그럼 다 강도가 되어야 천국 갑니까?

아니에요.

강도는 지옥 갑니다.

예수 믿는 강도가 천당에 갑니다.

 

강도짓 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면 되요.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강도입니다.

더 살인하고 강도짓 할 필요가 없어요.

충분히 살인자이고 강도이니까요?

 

죄인이 이것은 죄고 저것은 아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동 속에서 착함과 악함을 골라내려고 하는 짓거리를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이 되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를 만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 줄과 같은 십자가 피를 매 달지 않고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전 성화주의를 나무랄 생각은 없어요.

그게 그 사람들의 취미인데 어찌합니까?

남의 종교적 취미까지 내가 간섭하고픈 생각은 없어요.

 

착하게 살면 좋지요.

남에게 피해를 안주고 살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착함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보장해 주지도 못하는 성화를 붙잡지 말고 구원을 보장해 주는 십자기 피를 붙잡아야 합니다.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기 피를 믿고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되지만,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는 성화를 믿는 것은 오락이고 취미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락이고 취미생활과 같은 성화를 신앙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신앙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내 생명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의 피에 있다고 증거하며 사는게 최고의 신앙생활이고 성화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라고 말을 못합니까?

 

라합에게 있어 붉은 줄은 취미도 아니고 오락도 아닙니다.

라합에게 붉은 줄은 생명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붉은 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창문에 매 달고 산 것입니다.

라합과 같이 정탐꾼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달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붉은 줄을 매 달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한다는 것은 너무 독선입니다.

아니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받으라는 말은 너무 일방적인 것입니다.

 

맞아요.

복음은 일방적인 겁니다.

인간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인간의 기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예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겁니다.

 

사랑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능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영화배우라고 해서 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마음에 드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장금에 나온 이영애를 예쁘다고 하는데 제 눈엔 예쁘게 안 보여요.

전 별로 안 좋아해요.

이처럼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달라요.

 

죄인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요.

이건 하나님께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자랑스럽고 고마워지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십자가의 고마움이 없는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붉은 줄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갈 1:7-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바울은 하늘에 천사라 할지라도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피만이 참 복음이고 그 외는 모두 다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횡행하고 있던 유대주의 거짓 선지자들은 “믿음 + 율법 지킴 = 온전한 구원” 이라는 이설을 전했어요.

이를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음 + 성화 = 온전한 구원” 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구원은 그냥 구원이지 온전한 구원은 뭡니까?

그럼 불완전한 구원도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마치 믿음도 토종이 있고, 잡종이 있다는 것과 같아요.

믿음은 그냥 믿음이지, 온전한 믿음과 불완전한 믿음은 없어요.

 

믿음이냐! 아니냐! 만 있지 믿음 비슷한 것은 없어요.

믿어지면 믿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못 믿는 것입니다.

50%를 믿어지고 50%는 안 믿어지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냐?

강아지냐?

이건 말이 아니지요.

50%는 사람이고 50%는 강아지는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다니면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이설을 퍼뜨리고 다녔어요.

지금식으로 말해서 성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비롯해서 천사까지도 “예수 믿음 + 율법 지킴 = 온전한 구원” 을 말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 이라는 말은 “완전” 이라는 뜻이지 부족하니 채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인은 부족하니 말씀을 지켜서 온전해 지라는 말이 아니예요.

 

성경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는 말은 너희는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는 나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흑인이 열심히 세수한다고 해서 백인 되지 않아요.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입니다.

서로 달라요.

 

지금 하나님께서 “너희는 흑인이고, 난 백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너희는 짐승이고, 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말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럼에도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온전하라고 했으니 최선을 다해서 온전해져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흑인더러 백인이 되라는 것으로 듣고 있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육으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믿고 박수치면서 감사하면 될 터인데!

이게 안 믿어지니 믿어지게 하려고 지기 열심을 섞는 것입니다.

믿음에다 열심을 섞는다고 믿음이 되지 않아요.

 

그건 “믿,열,신” 이예요.

“믿,열,신” 이 뭐냐구요?

“믿음 + 열심” 이 만든 신앙이라는 “이단아” 이지요.

한국교회가 만든 “이단아” 입니다.

 

한마디로 “괴물” 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고 “믿,열,신” 이라는 “괴물” 입니다.

몸으로는 예수를 믿고 마음으로는 마귀를 믿는 괴물입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반인반수” 입니다.

 

육으로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도 “반인반신(伴人半神)” 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반인반신(伴人半神)”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요.

지금 제가 만든 말입니다.

이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을 구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선 예수님께서 물의를 걸으신 것은 “신성”이고, 화 내시고 우시는 것은 “인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신성과 인성을 구분해 놓았어요.

아니 하나님이 화 내시고 우셨다는 것을 왜? 안 믿습니까?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못 믿습니까?

하나님이 인간들로부터 버림당하고 죽임 당하였다는 것을 못 믿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신성과 인성으로 구분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나님 일이고, 예수님이 당하신 일이 하나님이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을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믿을 일이지 분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떻게 인간의 타락한 지혜로 하나님을 분석합니까?

 

신학으로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성령이 임하면 믿어집니다.

부활이니 영생이니 죄사함이니 하는 것들은 분석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을 어떻게 분석합니까?

 

창문에 붉은 줄을 달아 놓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건 하나님께서 라합을 구원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지금도 창문에 붉은 줄 매어 달아 놓는다고 구원받지 못해요.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 단 것은 그 당시 구원의 표시이고,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합 시대엔 믿음이 붉은 줄을 창문에 매 달게 하였고,

 

지금은 믿음이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 당시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매 달라고 했지만, 지금의 주에 종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저에게 말씀하기를 서울에 가니 어떤 사기꾼 목사가 하나님의 인(印)을 친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이 무어냐고 물으니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印)을 친다고 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성도들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친놈이 어디 있습니까?

더 가관인 것은 그 놈 앞에 가서 인(印) 맞겠다고 하는 인간들이 더 미쳤어요.

 

아마도 손담비 라는 가수가 저런 꼴을 보고 “내가 미쳤어!” 라는 노래를 부른 것 같아요.

내가 미쳤어!

내가 미쳤어!

맞아요.

 

지금 한국교회는 총체적으로 미쳤어요.

목사도 미치고 교인도 미치고 다 미쳤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식상해 합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목사들이 십자기 피를 말하면 화를 냅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교인들이 소경 목사를 지도자라고 따라가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지 확인 하라고 했습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금 붉은 줄을 창문에 달게 하였듯이, 지금도 믿음이 성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기 피라는 붉은 줄을 매어 달게 하십니다.

믿어지게 하십니다.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하거나 만들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밀물처럼 그져 밀려옵니다.

바람이 임으로 불듯이 그냥 불어옵니다.

바람이 지나가고 난 자라엔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나요.

 

마찬가지로 믿음이 쓸고 지나간 자리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는 떨림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지면 아! 주께서 성령의 바람을 내 영혼에게 불게 하셨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셔야 해요.

 

성령이 지나가고 난 자리엔 항상 붉은 줄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성령의 바람을 맞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붉은 줄을 매고 다닙니다.

이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아! 저 분도 성령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구나! 생각하세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린 형제 라고 악수 하세요.

이상하게 핏줄이 당기는 것처럼 당겨요.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서로를 끌어 당겨요.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증거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억지로 증거하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어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데는 어렵지가 않아요.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니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믿음을 각색하려고 하지 마세요.

받은 그대로를 토해내세요.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토해내세요.

라합이 붉은 줄을 창가에 매단 것은 라합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탐꾼들의 아이디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은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은 다듬을 필요도 없고 각색할 필요도 없어요.

그져 받은 그대로 내어 놓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은 지식이 아니예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받았잖아요.

믿음이란? 관념이 아니고 삶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을 말하면서 라합의 신앙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약 2:26=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합의 믿음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함을 낳게 하였다고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의 삶이 행함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고 기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함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행함 따로 믿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무얼 믿습니까?

예수님 피를 믿잖아요.

그럼 행함이 어떻게 나타나겠어요.

예수의 피를 증거하겠지요.

맞아요.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행함입니다.

야고보서가 라합의 행함이 뭐라고 했지요.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라 했어요.

정탐꾼을 영접하니 붉은 줄을 매 단겁니다.

 

붉은 줄을 매 단 것을 보니 정탐꾼이 왔다 갔구나!

믿음이 간섭하니 예수 피를 증거하는구나!

 

목사님은 왜? 예수의 피만 증거합니까?

그야 정탐꾼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그럼 목사님은 왜?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야 정탐꾼을 못 만났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정탐꾼이 다녀간 목사인줄 아시고 그 말을 들으세요.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으면 정탐꾼을 만나지 못한 목사이니 가짜이지요.

당연히 그런 목사의 말을 들을 필요도 목사로 취급해 줄 필요도 없어요.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삶이 나타나는 겁니다.

살았다는 것은 뭔가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니 당연히 움직일 때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겠지요.

 

예수의 생명이 성도에게 나타나면 성도는 죽은 자가 되고 예수 안에서 사는 자로 나타납니다.

자기를 증거하지 않고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라합에게 믿음이 덮쳐오니 자기 생명과 정탐꾼의 생명을 맞바꾸는 상태로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정탐꾼의 생명이란? 쉽게 말해 예수님 생명입니다.

라합은 자기 생명과 예수님 생명을 맞바꾼 겁니다.

 

성도는 날마다 생명을 바꿔치기 당하며 살게 됩니다.

믿음이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세상사람 아닌 것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마치 라합이 정탐꾼을 만나고 난 후로부터는 여리고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두고 살았듯이 살아가게 하십니다.

라합이 비록 여리고에서 살고 있었지만 정탐꾼들이 다녀간 후로는 창가에 매 달아 놓은 붉은 줄을 소망삼고 살았습니다.

 

비록 기생으로서 비류들에게 갖가지 수모와 희롱을 당하며 살아도 잠시잠간 후면 이 여리고는 망할 것이고 그 망함 속에서 자신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지나가는 한 과정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보면 좋은 그림도 보게 되고, 나쁜 그림도 보게 됩니다.

인생은 머물러 있는 여행길이 아닙니다.

다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하는 아픔도 다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갈 것들입니다.

힘이 드십니까?

 

바울의 권면으로 말씀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딤전 6:6-10=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핍에서 옵니다.

결핍은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결핍의 근원은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탐욕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감사가 넘치는 것은 자족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는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서 산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여야 합니다.

 

라합이 여리고에서 기생으로 살면서 아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다른 세상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을 보라보게 하지 않고 장차 오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라합이 편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웃음을 팔며 기생으로 사는 여인의 삶이 어찌 편안하였겠습니까?

믿음으로 살면 아픕니다.

당연히 아플 것이라고 여기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욕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증거하십시오.

십자가를 전한다고 박수쳐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단이라고 죽인 예수를 전하는데 가만 둘리가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에 힘이 든 겁니다.

 

12 제자나 바울의 일생을 냉정하게 음미해 보세요.

잠시도 편한 날이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모두가 만물의 찌끼같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라합이 기생으로 살다간 것을 생각지 말고 멸망하는 여리고에서 살아났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래 난 구원 받았잖아!

난! 천국에 가잖아!

난! 천국 백성이니 잠시 지옥 같은 맛을 보게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현실의 삶이 힘들고 아프더라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부디 라합을 간섭하셨던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늘 간섭하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무너져 내리는 여리고 성에서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내서 기어이 빼내 오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게 하옵소서, 한 알갱이라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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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내용 
♣'네 말과 세상의 본질 (계 6:1-17)
♣'고난 가운데서 주어지는 구원 (계 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