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 만들기 (히 1:5-9)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1172019-12-11 오전 6:09:00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 언약 (에베소서 1장 3-10)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맏아들 만들기 (히 1:5-9)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 다릅니다.

야구 선수는 어찌하면 야구를 잘할까 관심을 갖고 살고,

연예인은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장사하는 분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목사나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가 중심인 목사는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킬까 생각하게 되고,

복음이 중심인 목사는 어떻게 하면 십자기 피를 잘 증거할까 생각하게 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아가고자 하는 교인들은 복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가지고 복 받는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왜? 성경을 봅니까?

성경을 통하여서 무엇을 얻고자(찾고자) 합니까?

 

흔히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선 왜? 무엇 때문에 성경을 주셨을까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성경을 주셨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간과한 채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면 이는 성경을 보는 근본적인 자세가 틀린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았다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그 편지를 바로 본 것이 됩니다.

자기 뜻으로 보게 되면 보낸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만약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편지를 보았다면 그것은 편지를 잘못 본 것입니다.

 

이처럼 편지를 보낸 것은 수신자에게 발신자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편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읽을 줄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도끼파 조폭 우두머리라고 합시다.

그런데 작두파가 늘 깐족거립니다.

자꾸만 나의 구역을 침범하고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부하에게 손 좀 봐주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럼 내 편지를 받은 부하는 작두파를 응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 뜻을 분명하게 알아들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내 편지를 받은 부하가 손 좀 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여서 작두파 행동대원들의 손금을 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건 내 뜻이 아니지요.

 

내 뜻은 작두파를 쓸어버리라는 뜻으로 손 좀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 명령을 받은 부하가 문자대로 작두파 행동대원들의 손금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내 뜻을 오해한 것이기 때문에 내 뜻을 거스린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분명히 잘못되었지요.

 

그런데 이런 일들을 지금 한국교회가 하고 있어요.

한국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누가 기록했습니까?

이건 알지요.

 

성경은 자증(自證)하기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하지요.

모든 성경이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입니다.

 

자 중요하니 다시 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뭔가 말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에게 성령을 감동케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언어를 빌려서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빌려서 말한 것일 뿐이지, 인간의 뜻으로 이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헷갈리며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모순도 헷갈리지도 않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하였어도 인간의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기록케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그럼 성경은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보아야겠지요.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인간들 생각으로 풀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감동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원대로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성령의 감동이 주어지지 않아요.

성경 통독한다고 성령의 감동이 주어지지 않아요.

 

성령의 감동은 인간 쪽에서 조정 할 수가 없어요.

성령은 하나님께서 입혀 주어야 합니다.

마치 성경을 기록할 때처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지자들을 선택해서 성령의 감동을 입혀서 쓰게 하셨듯이 하십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은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을 입으면 해석할 수가 있어집니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똑똑하느냐! 천치 바보냐!

아이큐가 높으냐! 적으냐!

남녀노소 빈부귀천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임신하여서 아직 출생되어지지도 않은 태아일지라도 성령이 감동하면 이해하게 되요.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잖아요.

6개월째 세례요한은 엄마 뱃속에서 마리아의 뱃속에 금방 잉태된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였어요.

임신 6개월짜리인 세례요한이 아이큐가 많은지 적은지, 똑똑한지 바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많이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 결정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의 감동이 임하니 금방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예수님을 알아보더란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누구든지 성령의 감동을 입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중요한 일이 생깁니다.

성령의 감동을 모두가 입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보든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고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어요.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여서 성경을 기록했어요.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감동도 모두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성경을 기록하실 때처럼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을 입지도 않은 자들이 성경을 해석을 해서 망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를 하였어요.

성령의 감동을 입지 않으니 인간의 지식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실랄하게 비판을 했어요.

 

마 15:7-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산다고 자랑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셨어요.

헛되다는 것이 뭡니까?

헛 지랄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말이지요.

 

입술로는 엄청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작 그 마음속엔 사랑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을 잘 안다고 하는데 전혀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소경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책망하지 않고 “일렀으되” 라고 하지요.

“일렀으되” 라는 말은 이미 전에 말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상들의 유전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조상들이 가르쳐온 성경 해석법을 동원해서 가르치고 잇다는 겁니다.

그러니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신앙을 제사만 열심히 드렸지 긍휼을 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언제 제사 지내라고 했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 꼬라지들을 제대로 보고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라고 했다는 겁니다.

 

옛날에 다윗이 그러지요.

 

시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의 이 고백은 성령의 감동으로 한 고백입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을 하니 토설한 내용입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했는데 막상 죄를 짓고 나니 자기가 어떤 존제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나는 죄악 중에 출생을 했고,

죄악이 자기를 이겼다고 하고,

나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선 우리가 제사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뭘 행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번제를 기뻐하는게 아니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와보니 유대인들은 열심히 제사를 지내기에만 급급한 겁니다.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제사를 지내라고 한 뜻을 모른채 성경에 제사 지내라고 했으니 제사를 지낸 겁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맞지요.

왜냐하면! 성경엔 분명하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으니까요.

 

유대인들은 성경에 제사를 지내라고 했으니 지낸 겁니다.

자기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맞아요.

틀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언제 제사를 지내라고 했느냐 긍휼을 구하라고 했지!

누가 너희더러 제사 지내라고 했느냐! 라고 하니 넌 뭔데! 하고 죽인 겁니다.

뭐 이런 놈이 있어!

이 놈이 어디서 감히 성경대로 사는 우리에게 와서 헛소리 하느냐! 라고 하면서 죽인 겁니다.

성경도 모르는 놈이 하고 죽인 겁니다.

 

이제부터 슬슬 어려워지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오늘 살펴볼 내용은 성경의 근간을 아는 굉장히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러니 귀 종끗 세우고 들으세요.

미리 말하지만 아마도 조금 길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았어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문자적으로 지키며 살았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했지요.

그럼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을 하여야 하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로 이해를 한 겁니다.

그래서 조상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섬긴 겁니다.

 

유전이란? 전통이고 배워서 아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통 신앙이라고 해요.

한국교회에서 자랑하는게 뭡니까?

칼빈주의 정통신앙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칼빈주의라고 하면 아! 옳은 신앙 그러잖아요.

 

그런데 칼빈주의가 틀렸어요.

칼빈하고 사도바울하고 비교하면 틀려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중심 신앙인데, 칼빈은 교회 중심 신앙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사도바울은 교회를 성령께서 생성하고 관리한다고 했는데, 칼빈은 조직으로 교회를 만들었어요.

칼빈은 교회 안 나오는 자는 구원이 없다고 까지 했어요.

 

그래서 주일날이 되면 장로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자들을 잡아서 추궁하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죽이기까지 한 겁니다.

자기들은 예배 안 드리고 교회 안 온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어요.

우습지요.

마녀 사냥이라는 말들이 그때 나온 겁니다.

이건 마치 스데반을 죽인 유대인들과 같아요.

 

물론 칼빈이 중요한 일들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칼빈주의를 정통신앙이라고 하면 안 돼요.

 

굳이 정통신앙이라는 말을 쓴다면 12제자나 바울과 같은 정신으로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정통신앙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오로지 십자가 밖에 몰라요.

바울 서신서가 문자적으로 보면 모두가 명령법처럼 들려요.

“하라” “하지 말라” 는 식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명령을 하였어요.

 

하지만 바울은 이 명령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뱉어낸 말들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말한다 함은 지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고

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 할 수밖에 없느냐!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가 없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구원해 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하나님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지 말라고 했지요.

이걸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신 율법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은혜로 즉 선택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선택이지요.

아브라함이 선택 받을 때 하나님 말씀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 아브람아 내가 널 복에 조상 만들어 줄게! 그랬어요.

네가 앞으로 내 말을 잘 들으면 복에 조상 만들어 줄께! 가 아닙니다.

말을 잘 듣든지 안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구원했어요.

 

누가 아브라함에게 야! 너 어떻게 구원 받았냐! 라고 물으면

몰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복에 조상 만들어 준다고 약속을 해서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있을 때 율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아브라함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율법을 받았어요.

아브라함후손이란? 아브라함과 한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누구하고 한 약속입니까?

아브라함하고 했지요.

 

그래서 출애굽 할 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려 주었잖아요.

이스라엘과 애굽의 차이가 뭡니까?

어린양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로 갈라지지요.

비록 애굽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린양의 피가 발라지면 죽음이 넘어갔고,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죽었어요.

죽음에 천사는 피가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을 했어요.

 

이제 출애굽한 사람들은 몽땅 이린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겁니다.

피 안에 있는 거에요.

피 밖에 나가면 애굽인어요.

 

이제 피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떨어집니다.

알다시피 율법이 뭡니까?

전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법들이지요.

마치 사도바울 서신서와 같아요.

이해되세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율법을 주었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나온 자들에게 줬지요.

어린 양의 피로 나왔다는 말은 구원 받은 자란 말입니다.

그럼 율법은 구원과 상관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율법은 지킴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뜻이 되지요.

너희들 율법 안 지키면 죽인다.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준 겁니다.

너희가 이렇게 나쁜 인간들인데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는 어린양을 죽였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아는 자라야 어린양의 피에 의미를 아는 자가 되는 겁니다.

비록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 하였다 할지라도 이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 어린양의 피에 의미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광야에서 시험하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를 모르면 애굽 사람이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비록 어린양의 피로서 출애굽을 하였어도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애굽 사람이 들어가면 안돼요.

애굽 사람이란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는 사림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아는 자만 가나안에 들어가야 해요.

어린 양의 피를 아는 자가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어린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다 죽인 겁니다.

여호수아 갈렙 만이 이 의미를 알았어요.

그래서 광야에서 난 자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 법칙을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어린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면 그 놈은 가나안 족속과 똑 같이 징벌 대상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러한 반복의 역사입니다.

추려 내고 또 추려내고 한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표면적 이스라엘이 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다고 한 겁니다.

표면적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를 모르는 자이고 이면적 유대인은 어린 양의 피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에만 급급했지 어린양의 피 안에서 산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조상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섬기니 헛되이 섬긴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시고 지옥에 가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도 이런 유대교인들이 있어요.

이름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자들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해요.

그러면서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고,

성경이 분을 품지 말라고 했으니 분을 품지 말아야 하고,

성경이 비판하지 말라고 했으니 비판하지 말아야 하고,

성경이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으니 도적질하지 말아야 하고,

성경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니 살인하지 않아야 하고,

성경이 간음하지 말라고 했으니 간음하지 말아야 하고,

성경이 욕하지 말라고 했으니 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좌우지간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얼핏 들으면 무척 신앙이 좋은 것 같지요.

유대인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였거든요.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보는 자들은 최선을 다하여서 지켜야 한다고 해요.

백퍼센트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그래도 최선을 대해서 지키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했으니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온전해지라고 했으니 온전해 지려고 노력은 하여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성경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아요.

 

죄인에게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라는 말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회개를 왜? 가르치지 않느냐! 라고 항의를 합디다.

 

여러분 회개란? 하루 일과를 저녁때 반성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은 잘못 살았으니 내일은 잘 살아야지가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맨 날 이런 반성이라는 회개를 했어요.

유대인들이 회개가 반성하는 겁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단 모레가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을 갈고 닦았어요.

 

요즈음 가르침으로 말하면 어린아이로 머물러 잇지 않고 장성해 지라는 겁니다.

어떻게 장성해 지느냐 하면 예수님처럼 장성해 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고맙겠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만 있지!

 

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회개란? 탕자가 반성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반성은 잘 할 수 있었는데, 잘못하였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이 반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일인 줄 알아야 해요.

반성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악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상식으로 하지 마세요.

 

그냥 자존심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삽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 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중풍병자이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내 죗값을 대신 담당해 주셨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고 하지요.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새롭게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 언약의 관점에서의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구약에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지고 알려주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옛 언약의 관점에서 죄를 알고, 의를 알고, 심판을 알고 있어요.

옛 언약에서의 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고,

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심판은 율법으로 판단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새 언약의 관점에서 죄를 알게 해 주고, 의를 알게 해 주고, 심판을 알게 해 주어요.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것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 십자가 피 중심으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너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미를 모르는 것이 새 언약에서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 행실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새 언약 하에선 우리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너희 모든 죄를 사해주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해요.

 

이게 믿어져야 성령을 받은 성도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맨 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고 반성하고 합니다.

이런 것을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합니다.

 

옛 언약에서 죄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지만, 새 언약에선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 의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우리가 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서 만든 의를 입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 심판이란?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신약이고, 예수 밖은 구약이에요.

구약은 자기가 의를 만드는 것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만든 의로 사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을 보면 바울이 그럽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사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은 멸망입니다.

왜? 구약은 멸망인가 하면 자기가 말씀을 다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구약 사람인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 지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자기가 지켜야 할 말씀이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지요.

율법 아래 있던 나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심판 받았다고 하지요.

율법 앞에선 죽었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명령들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내가 더 이상 율법적으로 심판 받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성도에게 있어 죽은 놈이에요.

죽었다 함은 마귀가 더 이상 성도를 율법으로 죄인이라고 참소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옛날 율법을 가지고 책임 추궁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추궁당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자가 성도에요.

속된 말로 우리 행위로 인한 양심의 참소까지도 이겨야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져야 성도에요.

 

새 언약 하에서 죄란? 예수님을 안보고 자기를 보는 겁니다.

제발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마세요.

자기 꼬라지를 본다고 해서 고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자기 잘못을 안다고 해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죄인은 정답을 가르쳐 주어도 정답대로 살아 내지를 못해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아무리 온전해지고 싶고, 거룩해 지고 싶어도 완벽하게 안 된단 말입니다.

괜히 완벽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도 없으면서 살겠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울이 분병하게 그러잖아요.

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상관이 없으니 율법대로 안 살았다고 해서 율법이 너 왜? 율법대로 안 살았느냐고 추궁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왜?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이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 안에서 보면 율법은 죽은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율법은 없는 것과 같아요.

없는 것과 같단 말은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이 없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서 자기 꼬라지를 보고 자책하거나 반성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놈들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9 하물며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브리서 10장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죄하면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진리란? 앞서 지금까지 히브리서 10장까지 쭉 이야기 해왔던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율법을 이루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리란?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럼 진리를 모독하는 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거지요.

 

그럼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율법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아니!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이 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율법을 지킨 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그 죄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렀는데 그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난! 하나님 말씀대로 못살아서 죄송합니다! 라고하면 어찌 됩니까?

이런 놈이 마귀에요.

이건 죽여야 해요.

인정사정 볼 필요가 없어요.

 

아니! 우리가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 해 주셨는데, 예수님 앞에서 안 된다고 징징거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놈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한다고 하는 겁니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만들어서 성령을 욕되게 한 그 놈들을 하나님께서 원수로 갚아 준다고 하잖아요.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지요.

성령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성령의 증거를 우습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시작하면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한 겁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말을 흘러 듣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왜? 목사님은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딴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 못사느냐! 하고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고는 달라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도 있고 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 못사느냐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았어! 라고 정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지도 않을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라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느냐 안 했느냐 라고 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묻는 신앙생활이란? 너 예수의 피 때문에 산다는 것 아느냐 에요.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겠어요.

예수님의 피를 어떻게 여기겠어요.

목숨 걸고 지킬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이런 인간을 만나면 실갱이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설득하거나 이해를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믿게 해 주어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 소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논쟁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런 인간 만나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하고 무시해 버리세요.

 

여러분 솔직히 성경의 명령들을 다 뽑아서 적어 보세요.

“하라” 는 것도 뽑고, “하지 말라” 는 것도 뽑아 보세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죄라고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일점일획도 빠지지 말고 다 지켜야 한다 라는 말씀 앞에 서 보세요.

 

몇 개나 지키겠어요.

자기 안에 미움이 생기고 욕정이 생기는 것을 어찌 지켜낸단 말입니까?

이건 불가능해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키겠는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못 지켜요.

 

어느 인간도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막지를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본능적인 것까지 지키라고 했어요.

미음도 음욕도 지키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것을 못 지키면 다 못 지킨 것이 되요.

 

여러분 사람이 죽는 것은 온 몸이 병들어서 죽는게 아니에요.

간암 걸리면 죽고, 위암 걸려도 죽어요.

머리가 깨져도 죽고, 심장에 구멍이 나도 죽어요.

 

이와같이 하나님 말씀 중에 단 한 개라도 안 지키면 죽는 겁니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보세요.

온 율법을 다지키라고 하잖아요.

어느 것은 지키고 어느 것은 못 지키고 선별하지 말고 다 지키라고 해요.

하나를 어기면 다 이긴 것을 간주하겠다고 하잖아요.

이 말은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나누어서 지켰어요.

613개 중에 248개는 하라는 것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기가다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첨가 시켜 지키라고 했어요.

이건 죽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율법을 한마디로 정의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사랑을 하되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네 뜻과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웃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어요.

 

이게 가능하다고 봅니까?

안 돼요.

그 어떤 인간도 자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남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날 사랑하는데 남을 이용하지!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미운 놈은 죽이고 싶지 사랑하고 싶어지지 않아요.

나를 사랑할 때 반대급부로 사랑을 한다고 해요.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종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뭐냐!

자기만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자기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해요.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고 이 시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유대교 신자라고 해요.

옛 언약 하에 있는 구약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예수님을 믿으면서 말씀도 지키면 안 됩니까? 라고 물어요.

그러나 이런 물음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예수 믿는 것은 새 언약이지요.

말씀 지키는 것은 옛 언약이지요.

 

새 언약이란? 옛 언약하고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럼 예수도 믿고 말씀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성립 됩니까?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요.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하고 구원 받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로 할 일이 있어요.

그건 인간의 한계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고서는 죄를 깨달을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죄인인줄 말라요.

그러니 우리 죄를 깨닫는 의미에세너 하나님 말씀은 영원토록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겁니다.

예수를 믿든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중간 지대는 없어요.

 

예수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갈라디안 교인들이었어요.

갈라디안 사상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다른 복음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하늘에서 온 천사들일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시대 이런 자들이 있어요.

혼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꼴깞을 떨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본인이 그렇게 산다고 하는데서야 말릴 이유가 없어요.

그냥 믿어지는 대로 사세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라고 하면 성질을 내요.

 

오늘은 할 말이 많은데 아직까지 진도를 못나가서 어쩌나!

아무리 바빠도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였을 지라도 인간의 지혜로 해석하는 것을 금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기록한 성령께서 깨닫게 해 줄 때 가장 잘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은 인간들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지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서입니다.

 

그럼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함이어야 하겠지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시려고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여서 우리에게 주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뜻을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알려 주십니다.

모두에게가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과 같이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경의 중심을 말해 주셨어요.

뭐라고 합니까?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모든 성경은 누구 이야기라고요?

예수님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오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서 오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이걸 쉽게 말하면 한 남자가 있어 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들이지요.

예수님입니다.

이건 조금 있가 설명 드릴께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자연히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뭘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로 풀지 않으면 그 어떤 말이라도 다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하는 놈들이 있다고 하지요.

 

렘 23: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선지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한다고 하지요.

여러분 도적질이 뭡니까?

남에 것을 훔치는 거지요.

남에 것을 자기유익이 되게 하려고 훔치는 것이지요.

 

그럼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유익되게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인간 입장으로 이해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도적놈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지 인간 입장에서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성경의 기록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면 도적질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제가 Q. T 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성경을 많이 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보게 되면 보는 것만큼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열심이 없는 사람은 덤비지 않아요.

조금 안다고 하고 열심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항상 바락 바락 덤빕니다.

어느 시대이고 열심 있고 안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훼손시켜요.

 

제 설교에 시비 거는 사람도 대충 대충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시비 걸지 않아요.

꼭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저도 과거에 율법 아래 있었을 땐 그랬으니 다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 심하게 나무라지를 못하겠어요.

최대한 인내를 하고 제가 이해를 하려고 해요.

 

안타깝게도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보는데 있어 아들 중심으로 보지 않고 아전인수식으로 자기 유익되는 쪽으로 해석을 하고 있어요.

한 남자 이야기로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한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성경을 주셨는데 우리는 한 남자는 상관이 없고 오로지 자기 교회, 자기 가정, 자기 살아가는 이야기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 시킬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좋은 가정을 만들까?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일컬어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고 했어요.

교인들이 나는 성경을 이렇게 깨달았는데, 너는 어떻게 깨달았느냐?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건 엄청 위험한 겁니다.

 

성경은 우리가 깨닫는 것을 요구하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마음대로 깨달을 권리가 없어요.

즉 우리 마음대로 해석할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 마음으로만 해석을 하여야 해요.

그게 성경을 보는 법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이 뭐냐를 알아야지요.

하나님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지요.

 

그럼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

성경을 통해서 토로하시고자 하는 마음이 뭐냐를 알아야지요.

 

그게 히브리서 1장 2절에 말씀하셨어요.

아들을 말하고자 하심입니다.

 

오늘 내용은 간단합니다.

 

5절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아버지와 아들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이 세상에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아 내 아들을 보냈으니 잘 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아들에 관하여 관심이 없어요.

자기 살기에 바빴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낸 것에 대하여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하나님이 보낸 이야기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목사를 세운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세운 목사라고 한다면 초지일관 하나님 아들이야기를 해 줘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들 이야기를 하니 시큰둥합니다.

반응이 없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 사정만 들어달라고 하지 하나님 아들에게 관하여는 알고자 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목사들이 하나님이 말하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인간들이 원하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세운 목사와 하나님이 세운 목사가 구분이 됩니다.

인간이 세운 목사는 인간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하나님 아들이야기만 합니다.

 

인간이 세운 목사는 교회부흥을 말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자고 교회 개혁을 외치고 뭔가 사람들에게 어필이 될 만한 일들을 벌리는 겁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자기 교회에 붙잡아 두려는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오로지 아들 이야기만 합니다.

교회부흥도 관심이 없어요.

사람들에게 비위 맞추는 일도 없어요.

듣든지 안 듣든지 예수님 피 이야기만 해요.

그래서 융통성 없고 폐쇄적이다 이단이라는 말을 듣는 겁니다.

너만 잘났느냐!

너만 목사냐!

 

바울이 가는 곳마다 욕을 막고 핍박을 받는 것도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를 하니 그런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받았던 성령을 받은 목사나 성도는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바울과 같은 말을 하여야 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제가 억지로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성경을 가지고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 했어요

히브리서도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에요.

 

바울이 언제 교회 개혁을 외치고 교회부흥을 외치고 하였습니까?

바울이 언제 성화를 외쳤습니까?

 

바울은 교회를 관리하고자 하지 않았어요.

교회는 성령께서 알아서 관리한다고 했어요.

어디에 인간들에게 교회를 이렇게 저렇게 운영하라고 하였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을 성경을 가지고 교회 운영하는데 이용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한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아들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전부 도적놈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그냥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맏아들” 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잘 따라 오세요.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맏아들이란? 첫째란 말이지요.

그리고 “맏이” 라고 할 때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라는 말이지요.

혼자 일 것 같으면 “맏이” 라 하지 않고 독자라고 합니다.

“맏이” 라 할 때는 둘째 셋째가 잇다는 말입니다.

 

뭔가 생소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 한분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둘째, 셋째,,,,,쭈르르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런 맏아들을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왜?

예수님을 자기 형제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히 2:10-12=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이게 엄청 중요한 말이니까 본문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보낸 것은 많은 아들을 이끌고 영광에 들어가고자 보냈다고 합니다.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받게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으로 인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떻게 영광으로 인도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영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맏아들이 받아야 할 고난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맏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풀려 집니다.

예수님께서 형제가 될 자기 백성들을 자기의 죽음으로서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로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놋뱀 이야기로 말씀하셨지요.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자가 높이 들려서 영생을 준다고 하지요.

즉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생을 얻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에서 구원하느냐 하면 자기 죽음으로 구원해 낸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의 형제가 될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생겨난다는 말이 됩니다.

아주 의미심장하지요.

예수님의 형제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생겨난 형제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에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 된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말 할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피를 같이 나눈 형제라면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지요.

형제라면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다 틀렸다는 말입니다.

다 틀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하나님 뜻을 잘 수행 했으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낸 것은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가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죽였어요.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인 세상(이스라엘)을 작살 낸 겁니다.

그리곤 그 아들을 다시 살려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겁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나오지요.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마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주인이 포도원을 남에게 맞기고 세를 받기로 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때가 되어서 세경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세경이 뭔지 알지요.

쉽게 말해서 포도원을 빌려준 세를 받으러 보낸 겁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치는 놈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보내는 쪽쪽 다 죽였어요.

그래서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낸 겁니다.

설마 아들을 보내면 세를 주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오지 아들마저도 죽이고 말았어요.

왜? 죽였느냐?

포도원을 자기 것을 차지하려고 그런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기 피를 증거하라고 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시켜놓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변에 복음 전하는 목사들을 통해서 십자가 피를 말하게 하니 이단이라고 출교 시키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기 피를 말하는 목사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원수란 말입니다.

스스로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단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피만 말하지 않는 자들은 몽땅 저주 받을 자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가지고 아들의 죽음을 모퉁잇돌로 묘사하고 있지요.

모퉁잇돌이란? 집을 짓는데 기초석을 말합니다.

 

이 모퉁잇돌을 기준으로 해서 집을 지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는지 살펴봅시다.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버리운 바 된 예수님을 신령한 집을 짓는데 모퉁잇돌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신령한 집이란? 하늘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말하는 겁니다.

아까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신령한 집은 예수님처럼 버림 당한 자들로 지어진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생겨난 성도를 말합니다.

이런 성도가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과거엔 긍휼을 입지 못하여서 진노 아래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 아래서 건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아까 포도원 비유로 말하면 농부들에게 죽임 당한 아들을 기준으로 해서 새로운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근거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에 아브라함 후손들은 전부 좇아내고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겨난 성도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예수님의 피가 묻어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묻어져 있으면 예수님과 한편으로 보시고 장차 애굽에 장자가 죽어지는 그러한 종말에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들이 이해가 되세요.

진도 나가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해하는게 중요합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으세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강한 자가 되셔야 해요.

 

조금 더 나가 봅시다.

길더라도 이해하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가지고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그 십자가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거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거나,

사업 잘하게 해 달라거나,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들은 알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담긴 그 의미를 모르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는 말씀대로 살아서 생겨나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서 생겨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말씀으로 살겠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보세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다 하나에서 났다고 하지요.

그래서 형제라고 하지요.

교회는 바로 이런 것을 선포하고 찬송하여야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서 이 아들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건져내려고 오신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아들을 구약에서부터 초지일관하게 말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약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이 성경에 이미 기록해 놓은 것같이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잖아요.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짐승이 아니라 자기 몸을 드리려고 왔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 책에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구약 성경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마음대로 일하지도 살지도 못한 겁니다.

철저하게 아버지 뜻을 이루면서 사셨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온 목적이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니까요.

 

이런 관계를 종속적(從屬的) 관계라고 합니다.

종속적 관계란? 보내신 분에게 복속(服屬) 되었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일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내신 분의 의중을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보내신 분의 종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 앞에선 종(從)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의 뜻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살린다는 말은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죽어 있다는 말이지요.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뭔가를 알아야겠지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이 되었습니까?

그건 죄 때문입니다.

 

죄가 뭡니까?

창조 목적에서 이탈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된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인간을 왜? 창조 하였느냐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렇잖아요.

뭐가 어렵습니까?

지금 제가 억지로 논리를 전개합니까?

아니지요.

 

그럼 인간의 창조 목적을 봅시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귀를 기우려 봅시다.

 

먼저 요한복음을 봅시다.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에 계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도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우니 잘 들으세요.

 

지금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야! 내가 성령의 감동으로 태초를 보았는데!

그 태초에 하나님 세계는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더라!

 

이걸 편의상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라고 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아들 하나님 즉 성자라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말씀 하나님이신 성자 곧 아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하더랍니다.

그럼 만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들이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만물을 창조하라고 한 것은 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 고 합니다.

“그 안” 이란? “아들 안” 이란 말입니다.

 

그럼 만물은 지금 누구의 생명을 담고 있는 겁니까?

아들의 생명이지요.

만물은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자 보세요.

만물이 아들에 의하여서 창조가 되었다고 했지요.

그럼 만물이 아들의 말을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겠어요?

당연히 알아듣겠지요.

 

이러면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자 풍랑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무화과나무가 금새 말라 죽고 하는 것은 자연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고 잇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만물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음으로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라는 것이 입증이 되었지요.

그렇잖아요.

풍랑이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것이 있어요.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죽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을 안 들어 쳐 먹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럼 아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낸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고 했지요.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먹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 말씀을 알아먹는 사람은 산 사람이고,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겁니다.

 

왜? 인간들이 예수님 말씀을 못 듣는다고 했습니까?

죄 때문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게 하려면 뭐를 해결하여야 합니까?

죄 문제이지요.

죄만 없애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럼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뭐겠어요?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성경의 중심 사상은 곧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되겠지요.

성경을 안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셨는가를 아는 것이지요.

 

만약 성경을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가 있느냐 라든가?

인류평화를 말한다거나,

환경보호 운동을 말한다거나,

교회 부흥을 말한다거나,

어떻게 하면 착한 사람이 되는가를 말한다거나,

좋은 아버지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것을 접근하면 모두가 반칙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경을 가지고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겁니다.

도적질하는 그 목사는 강도이고 도적놈이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습니까?

그건 아들에 관하여 관심이 없고 신앙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나라의 번성을 꿈꾸었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한 도적놈들이지요.

 

이런 관점으로 이 시대 교회들을 보세요.

그러면 교회가 아니라 도적놈 소굴이라는 것이 밝혀지지요.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 하지 않는 교회는 몽땅 도적놈 소굴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 않는 교회가 도적놈 소굴인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낸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잖아요.

그럼 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뿐이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초지일관 변하지 않고 증거하여야 할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가 되지만,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으면 수십만 명이 모여도 교회가 아니고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러니 교회란 사람이 많이 모이느냐 적게 모이느냐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양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다른 말을 하다가 조금씩 섞어서 우리도 교회라고 하는 식으로 남기고자 이용하는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기 위해서 세상 이야기는 할 수가 있어도, 세상 이야기 하다가 의미 없이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 십자가 피를 말해도 안 되고, 성화를 위해서 십자가 피를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 피는 설교에 인용되어지는 예화가 아닙니다.

설교의 핵심이고 주 내용이어야 합니다.

변두리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기 위해서 교회도 있고, 목사도 있고, 성도도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 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중요한 것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 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럼 만물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 한 겁니다.

 

그러면서 만물 속에는 눈에 보이는 땅에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보좌나 주관이나 정사나 권세들이란? 천사들 세계나 이 세상이나 모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모든 것을 가지고 아들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육신의 세계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적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엔 우리 인간들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엔 천사들이 있겠지요.

마귀도 여기에 속합니다.

 

마귀도 누구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까?

아들을 위해서이지요.

즉 예수님을 위해서 마귀도 필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천사들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본문을 볼까요.

 

히 1:5-9=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고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사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사는 다만 하나님 아들을 경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인간들처럼 낳아짐을 당하였다고 하여도 피조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있다고 해서 피조물로 보면 안 됩니다.

피조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은 믿을 대상이 아니고 본(本)받을 대상이 되요.

 

마귀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본(本) 받으라” 고 해요.

“예수를 닮자” 라고 해요.

 

“본(本) 받는다” “닮는다” 라는 것은 동류(同類)라는 뜻입니다.

동류일 때는 “본(本) 받자” “닮자” 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다른 종류(種類)이면 “본(本)받자” “닮자”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예수를 본(本) 받읍시다” “예수를 닮읍시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 딴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오늘 본문을 구약의 시편에 이미 예언이 되었어요.

구약에 예언이 되었다는 말은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고 이미 약속을 하고 그 약속대로 일을 진행시켜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가 아들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에 어떻게 예언이 되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시 2:7-12=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지금 시편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세상에 공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들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열방을 유업으로 주셨다는 말은 신약식으로는 만물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군왕들은 누구든지 그 아들에게 와서 지혜를 얻고 교훈을 받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곤 그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한 몸이 되라는 겁니다.

영접하라는 겁니다.

그 안에 거하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퍼붓겠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전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 어디 예수를 본받으라거나,

성화를 하여야 한다거나,

교회를 개혁 하여야 한다거나,

행실을 올바로 하고 저녁때가 되면 하루 일과를 돌이켜 반성하라는 게 없어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한 형제라고 했지요.

거룩하게 하는 자는 당연히 예수님을 말하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지, 자기가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을 만들어 내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거룩함을 입는 것을 시편에선 입을 맞춘다고 하는 겁니다.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더러 의롭게 되라고 한 적이 없어요.

거룩해 지라는 것이 없어요.

설령 거룩하라고 한 말씀도 인간의 언어로는 그렇게 밖에 표현 할 수가 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이건 육에 속한 자들이 못 알아 먹게 하려고 하신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자들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시지 않으니 육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은 예수를 본받게 하고 예수를 닮게 하려고 오시지 않았어요.

이건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말인데 중요하니 다시 말을 해야겠네요.

 

하나님께서 만약 성도를 예수님을 본받게 하고 닮게 하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을 죽이지 말고 인간들에게 너희들 이렇게 살아라 하고 그대로 승천시키시면 됩니다.

 

봐라!

내 아들을 보여주었으니 이렇게 본받고 닮으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과 상관이 없이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을 본받고 닮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안 죽으려고 하니 천사를 보내서 죽도록 수종을 들게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 한 것을 보면 예수님도 죽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도록 돕게 하셨어요.

 

그리곤 부활 승천케 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셨어요.

성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종속시켰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그리스도에게 종속 시킨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케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기 위함이에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예수님을 본받게 한다거나 닮게 하는 일을 하시지 않아요.

그건 인간들이 오해한 겁니다.

자기 안에 법이 자라잡고 잇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속제물로 죽어주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기 피를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서 형제가 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세상의 주가 되셨다 라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 보세요.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本體)라고 하지요.

본체란? 본질(本質)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인간과 다르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왔지만 인간과 다른 분이십니다.

인간과 다른 본질을 가지신 분이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입니다.

왜? 구태여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죽어야 합니까?

 

이는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어 주려면 자기백성들과 똑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속(代贖)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제가 잘못을 해서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나라 법(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해요.

사람을 죽였으니 사람으로 갚아야 합니다.

 

제가 과거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현장 오리엔테이션 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것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예화가 될 것 같아서 말합니다.

 

근무지에 가서 현지 법(法)에 대하여서 교육을 받습니다.

특히 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교육을 철저히 받아요.

 

알다시피 사우디는 이슬람국가입니다.

이슬람 경전이 율법(律法)입니다.

율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생명에는 생명입니다.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그 손해를 입힌 것만큼 본인이 손해를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만약 실수든지 고의든지 간에 현지인을 죽였다고 하면 자신도 죽어야 해요.

차량사고라고 해서 과실치사 라는게 없어요.

실수로라도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이면 죽는다고 교육을 합니다.

한국같이 감옥살이로 끝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육하는 분이 실례(實例)라고 하면서 말하였어요.

당시 타 지역에서 차 운전을 하시는 분이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어서 사람을 죽였어요.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결혼을 해서 아내를 세 명이나 둔 남자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 지역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면서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해요.

 

그 죽은 사람의 아내도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한 엘리트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으면 꼼짝없이 과부로 살아야 할 판입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죽인 한국 남자도 꼼짝없이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아내들에게 남편을 죽인 그 운전사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율법대로 그 운전사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이 그 운전사를 죽은 남편 대신 데리고 살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과부로 살기 싫으니 그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자기들에게 달라고 했답니다.

죽은 남편 대신 남편이 되어서 살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한국 사람은 그 아내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를 엄청 부러워하였어요.

야! 그 사람 횡재했다고!

졸지에 아내 세 사람을 거느리고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게 실화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당시 우리는 사실로 믿었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말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살리려면 자기백성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와서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속이 되는 겁니다.

 

대속이란? 동등한 것으로 하여야 효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에 짐승의 목숨을 준다고 하면 셈이 틀려집니다.

 

사우디 이야기처럼 남편을 죽어놓고 미안 하다고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마네킹이나 짐승을 하나 갖다 주면서 나 대신 죽이세요 라고 하면 계산이 틀리지요.

자기와 동등한 목숨을 갖다 주고 죽이세요 라고 해야 옳지요.

만약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삼대독자 외아들을 갖다 주면서 나 대신 죽이십시오 라고 하면 얼추 계산이 맞아 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짐승을 요구하지 않고 아들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들보다 나은 자라야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살리시려고 자기 백성들과 동일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겁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자기백성들의 생명과 맞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천사로 보내지 않고 육신을 입은 아들로 보낸 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하는 주(主)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을 만물의 주(主)의 자리에 앉히신 겁니다.

모든 만물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서 만물의 주(主)가 되셨어요.

만물의 주(主) 란? 임금이고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아까 만물 속에는 하늘에 천사도 있고 땅에 인간도 있다고 했지요.

만물 속에는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습니다.

절간에 중도 예수님 것이고, 교회에 성도도 예수님 것입니다.

 

만물의 주(主)가 하는 일은 심판하는 일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天地)를 창조하셨다고 했지요.

천지란? 문자적으로는 하늘에 세계와 땅 세계를 말합니다.

하늘은 천국이고 땅은 지옥입니다.

 

그럼 왜?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습니까?

그건 예수님이 심판 주(主)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아까 주가 무슨 일을 한다고 했습니까?

심판한다고 했지요.

갈라낸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천국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갈라내십니다.

자기 피로서 형제와 형제 아닌 자를 갈라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지고 있으면 형제로서 천국에 가고, 피가 없으면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의미를 아는 자는 천국으로 인도하고, 모르는 자는 지옥으로 데리고 갑니다.

 

천국에 갈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기를 위한 대속에 사건으로 믿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구나! 를 생각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생명입니다.

 

동화 속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자신이 살았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명처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치장하고 복이나 받고 살자고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출세하고 행복하게 잘 살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바로 아는 성도는 정신머리를 딴 데 두지를 못해요.

성화하고 반성하는 짓거리를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디 예수님의 피 가지고 성화하자고 하고, 교회 개혁하자고 하겠어요.

성화가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고, 개혁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짓을 안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로 오시지 않고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변화시키고 교회 시켜서 반듯한 사람을 만들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 대신에 죽으려고 오셨어요.

 

왜? 예수님이 대신 죽어셔야 만 합니까?

예수님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성화 시켜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고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여서 데리고 가십니다.

왜? 죽어야만 합니까?

고쳐도 안 되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죽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죽이고 다시 살려서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가 십자가에 죽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자기가 없는 셈입니다.

자기가 없으니 자기를 보지 않지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신을 바라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뭡니까?

예수 믿는 거잖아요.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반대말이 뭡니까?

예수를 안 믿고 자기를 믿는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한다는 말이 얼마나 감사한 말입니까?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한다는 말은 나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나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가 하는 그 어떤 것도 책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성화주의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그러면 정 목사 당신 말대로 하면 교인들이 개판으로 살면 어찌하느냐 입니다.

 

이 사람들이 놓치는 것은 성령이 폼으로 와 있는 줄 알아요.

성령이 알아서 간섭한다는 것을 못 믿어요.

이게 안 믿어지니 자기들이 관리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간섭하는데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삽니까?

믿음으로 살란 말은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그럼 성령이 예수 안에서 살도록 간섭을 하시겠지요.

이건 완벽하게 살도록 간섭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함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간섭을 해도 육체는 또 나름대로 한 고집을 해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늘 백마고지 전투하듯이 싸우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사로 몸을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육신이 이기면 몸뚱이라는 죄를 짓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성령이 이기면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싸움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옵니다.

육신은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해요.

우리들은 다윗이 범죄하기 전에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네 이놈! 어디서 감히 남의 아내를 탐하려고 하느냐! 라고 호통을 쳐주길 바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미 범죄하고 난 후에 보내지요.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해요.

이걸 모르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범죄 후에 나단 선지자를 보낸 것은 넌 이런 종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요.

세상에 자기 바람 피운 것 감추려고 충신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그런 악함이 있는줄 몰랐어요.

 

아마 나단 선지자가 찾아 가지 않았으면 다윗은 완전 범죄를 하였다고 하면서 점잖고 성자처럼 살았을 겁니다.

그럼 스스로 스스로를 속이면서 위선자가 되어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하자 나단을 보내서 넌 살인자라고 일어주는 겁니다.

 

그러곤 터져 나온 고백이 시편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하였고, 나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여도 용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듯한 삶을 바라지 않아요.

이건 여러분 마음대로 살란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반듯한 삶을 살 수도 없을뿐더러 죄인에겐 반듯한 삶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아들을 보냈어요.

아들을 맏아들 되게 하시려고 아들이 될 자들을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통 아들에게 가 있어요.

아들이 죽음에게 가 있단 말입니다.

왜? 내 아들이 죽었는지 너희는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내 아들의 죽음이 의미를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에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가장 나쁜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색욕거리로 만드는 겁니다.

색욕거리로 만든다는 말은 무가치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의미 없게 만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만드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신앙생활이란? 아들이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모든게 감사가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찬송이 그냥 찬송이 아니고 간증적인 찬송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 들어가면 행복합니다.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엔 오직 안식만 있어요.

부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주이지는 안식을 누리시면서 지옥같은 세상 속에서도 천국으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을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들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져 감사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아들을 보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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